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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밤이 5월의 새벽에게 묻다

5월의 침묵이 12월의 소란에게 답했다.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된다고.
12월의 밤이 5월의 새벽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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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3. 생일 밤의 현장 (직접 촬영)

2025년 12월 3일은 잊을 수 없는 생일이었다. 늦은 밤 조깅을 하다가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계엄령이 터졌다고.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를 켜보니, 이재명 당대표가 당장 국회로 와달라는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집은 홍대였고 국회는 가까웠다. 가야하나, 위험한가, 미친짓 아닌가? 이런 순간이 윤 정권 내에 올 거라는 예감은 있었으나, 이렇게 실제로 일어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차를 가져가면 주차가 어렵겠지,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그 계엄령의 밤이 내게 남긴 것은 질문이었다. 역사는 왜 반복되는가? 과거의 상처는 왜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는가?

5개월이 지난 지금, 문득 광주로 향하게 된 여행이 민주주의의 위기 순간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아내의 연구 일정을 따라 동행한 이 여행이, 내게는 역사의 두 순간을 잇는 깊은 경험이 되리라고는.

2025.5.17–18

나는 광주와 특별한 연이 없다. 부모님 모두 경상도 사람이고, 내 삶에서 광주는 몇 번의 출장지로만 남아 있었다. 내 생일의 밤이 오기 전까지는, 광주의 아픔이 내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예고도, 목적도, 계획도 없이 5월 17일 밤, 마치 내면의 이끌림을 느낀 듯 나는 차에 올랐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7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12월의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가야만 할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망월묘역에 도착했다.

한밤중 깜깜한 망월 묘역

말씀하신 대로 '개인의 서사'를 조금 뒤로 물리고, '현장의 공기'와 '시대의 질문'이 더 잘 보이도록 다듬었습니다.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운명적 이끌림'이나 '비장한 의식' 같은 표현을 덜어내고, 담담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12월의 충격과 5월의 침묵을 연결했습니다.


[에세이] 12월의 밤이 5월의 새벽에게 묻다

2025년 12월 3일, 내 생일이었던 그날 밤을 기억한다. 늦은 조깅 중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계엄령. 믿기지 않는 뉴스 속보를 보며 무작정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위험하지 않을까, 미친 짓은 아닐까 하는 망설임보다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밤, 국회 앞의 혼란 속에서 내게 남은 건 하나의 질문이었다. '역사는 왜 반복되는가. 과거의 상처는 왜 아물지 않고 불쑥 튀어나오는가.'

그로부터 5개월 뒤인 5월 17일, 나는 광주로 향하는 차 안에 있었다. 아내의 연구 일정에 동행하는 길이었지만, 내심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7시간. 핸들을 잡고 달리는 동안 나는 줄곧 12월의 그 밤을 생각했다. 그날의 공포와 분노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정을 넘겨 도착한 망월 묘역은 적막했다. 추모제는 이미 끝났고, 불 꺼진 묘역엔 북소리 대신 풀벌레 소리만 가득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밤, 국회 앞이 소란스러운 혼돈이었다면, 이곳은 무거울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었다.

어둠 속에서 비석들의 이름을 더듬어 보았다. 달빛조차 흐릿해 글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 공간이 품은 무게만큼은 선명했다. 나는 허리를 굽혀 묘역의 흙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12월의 우리가 느꼈던 불안의 뿌리가, 어쩌면 아직 위로받지 못한 이 땅 깊은 곳에 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5.18에 가본 광주에서 마주친 전일빌딩 245.

이튿날 5월 18일, 날이 밝은 광주의 거리에서 나는 그 실체를 보았다. 전일빌딩 245의 벽에 박힌 총탄 자국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는 증언이었다. 금남로에 걸린 "지켰다 민주주의"라는 현수막을 보며 나는 12월의 국회 앞을 떠올렸다. 우리가 지키려 했던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서 피로 지켜낸 약속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려던 참에 아내의 말이 발길을 돌려세웠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1묘역이 있어. 거기에 더 외로운 분들이 계셔."

나는 다시 묘역으로 향했다. 더 깊고, 더 조용한 곳. 이름 없는 비석들이 놓인 자리. 5월의 비극 속에서도 소외된 이들이 잠든 그곳은 12월의 그 밤, 우리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한 두려움과 닮아 있었다.

나는 챙겨 온 흙을 그곳에 조용히 섞었다. 거창한 의식은 아니었다. 그저 잊혀진 희생과 오늘의 기억이 다르지 않음을, 5월의 아픔을 기억하지 않으면 12월의 위기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음을 내 손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안동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 풍경은 평온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소외된 곳에 묻힌 진실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것. 그것이 반복되는 역사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길임을, 나는 광주의 흙을 만지며 배웠다.

5월의 침묵이 12월의 소란에게 답했다.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