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쿠팡, 그리고 한국 사회의 정렬 시험(Alignment Test)
수백만 명의 고객 데이터 유출과 뒤이은 대표의 국정감사 불출석 논란. 이번 사태는 애초에 이렇게까지 확전될 일이 아니었다. 김범석과 쿠팡에게는 초기에 단 하나의 선택지만 있었고, 그 선택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책임지고, 비슷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말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해명이었고, 법률적 거리두기였으며, 책임의 분산이었다. 그 순간부터 이 사건은 단순한 보안 사고가 아니라 ‘윤리적 실패’로 성격이 바뀌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만든 것은 해커가 아니라, 바로 이 선택들이었다.
숫자가 아닌 태도의 문제
국민적 공분은 유출된 숫자의 크기에서 나오지 않았다. 몇 명의 데이터가 털렸는지가 아니라, 누가 책임 앞에 서지 않았는가가 분노의 핵심이었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결함보다 리더의 태도를 보았다. 사과보다 변명을, 응답보다 회피를 읽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정확했다.
김범석은 오랫동안 책임을 최소화하는 구조를 만들어온 인물이다. 의사결정의 흔적은 조직 뒤로 숨었고, 법인은 방패가 되었으며, 개인은 배후로 물러났다. 쿠팡의 성장 서사는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최적화(Optimization) 모델’이었다.
비용은 줄이고, 속도는 높이고, 책임과 위험은 구조 밖으로 밀어내는 방식. 이 모델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동시에 위험을 축적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축적된 위험이 청구서가 되어 돌아왔다.
엇갈린 시계: 방어에 멈춘 논리와 이동한 기준
이 국면에서 김범석의 패착은 그가 기댄 ‘믿는 구석’에서 비롯된다. 현재 미국의 기업 환경은 로비를 통한 ‘법적 방어의 최적화’가 거버넌스의 표준으로 과잉 안정화된 단계다. “규제는 적, 혁신은 선”이라는 이분법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한다. 김범석은 이 미국식 문법, 즉 효율과 방어의 논리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시계가 이미 바뀌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지난 6개월, 이재명 정부가 보여준 국정 운영의 핵심은 ‘정렬(Alignment)’이다. 위기 시 회피보다 인지를, 책임을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제도의 문제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최근 크리스마스 내각 소집은 상징적이다. 이는 지지층 관리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이 위기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겠다는 질서의 재정렬 신호였다.
한국 사회는 이제 ‘합법적 회피’를 용인하던 단계를 지나, ‘공동체적 책임과 정렬’을 요구하는 국면으로 진입했다. 김범석은 이 변화된 진동수를 읽지 못한 채, 과거의 방어 논리로 새로운 기준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길, 그리고 정체성의 선택
이제 'Bom Kim' 대표 앞에 놓인 선택지는 명확하다.
- 선택 A: 방어의 완주
방어에 성공하여,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회피의 구조’를 완성한 기능적 기술자로 남게 된다. - 선택 B: 책무의 수용
통제는 일부 상실되고, 불확실성은 커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로소 ‘최적화’를 넘어선 시대의 리더로 기록될 수 있다.
이것은 더 이상 경영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의 선택이다.
미국식 경영자 ‘Bom Kim’은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완벽해지려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쿠팡을 선택해온 한국 사회가 부르는 ‘김범석’이 아직 그 안에 존재한다면, 그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응답해야 한다.
이 순간은 그가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묻는 자리가 아니다.
그가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하자. 지금 한국 사회가 쿠팡에게 던지는 질문은 로컬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거부하는 쇄국이 아니다.
오히려 20세기적 효율의 논리에 머문 세계를, 더 높은 차원의 ‘가치 정렬’로 끌어올리려는 대한민국의 '초대'다.
우리는 지금 그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그 초대에 응할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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