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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교당에 돌아온 제비

2026년 제1회 병산서원 강학회 참관기
입교당에 돌아온 제비
100여 년 만에 되살아난 병산서원 강학. 제비들은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쉬지 않고 입교당 처마를 오갔다.

2026년 7월 10일 새벽 여섯 시, 13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던 제주 워크숍 일정을 하루 비우고 조용히 제주 공항으로 향했다.

아침 비행기로 대구에 도착한 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조금 무리한 일정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도포로 갈아입을 시간도 빠듯했다.

오후 두 시 반, 존덕사 앞에서는 류시역, 류종하 유사의 인도로 서애 선생께 강학회의 시작을 아뢰는 고유례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류용우 유사가 고유문을 낭독하는 소리가 존덕사 바깥 마당에까지 들려왔다.

承先啓後  繼往開來
앞선 분들의 도를 이어 후학을 열고,
지나온 학맥을 이어 미래의 학문을 열고자 합니다.

고유례가 끝나자, 입교당에 모두가 모인 가운데 류시용 유사가 백록동규와 향약을 낭독했다.

그 구절을 들으며 이번 자리는 옛 모습을 재현하는 데 머무는 행사가 아니라, 지나온 학맥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이어 미래의 학문을 열려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승우 설봉서원장, 김병일 도산서원장, 서정학 병산서원장 앞에서 류시용 유사가 독약으로 강학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고유를 마치고 입교당(立敎堂)에 앉았다.

‘가르침을 세우는 집’.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의 일곱 칸 기둥 사이로 병산의 푸른 절벽과 낙동강이 액자처럼 펼쳐진다. 처마 밑에서는 제비들이 분주히 둥지를 오가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400년 전 이 마루에 앉아 글을 읽던 유생들의 머리 위에도 저 제비들이 날아다녔을까.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는 병산서원이 관광을 위한 박제로만 남은 것 같아 한켠으로 아쉬웠다.

그 마음이 바뀐 계기가 있다. 작년, 아시아 여러 국가의 AI 업계 손님들을 병산서원에 초대해 안내하던 날이었다. 류한욱 회장과 더불어 류시역, 류종하 유사께서 병산 서원의 면면을 소개해 주시며 문화대혁명으로 뿌리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중국의 서원들이 자신들이 잊은 것을 배우러 한국까지 와 병산서원과 하회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다른 나라들이 이미 모두 잊은 것을 우리나라의 어른들이 이만큼이나마 기억하고 지켜 주셨다는 것이 그 자체로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깨닫게 됐다. 이를 진작에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고, 그 시간을 지켜주신 어른들께 송구해지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선대가 지켜주신 토대 위에서, 이제서야 서원의 본래 취지인 강학이 되살아 나는 듯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는구나 싶었다.

공부하는 서원


이번 강학회는 병산서원이 ‘관람하는 서원’에서 ‘공부하는 서원’으로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 첫 자리였다. 근대화 이후 끊어졌던 강학의 전통을 100여 년 만에 되살리는 자리라고 했다.

형식부터 낯설고도 신선했다.

서원의 규약을 함께 읽는 독약(讀約)으로 배움의 기강을 세우고, 강학 전체를 주재하는 강장(講長)이 자리를 이끌었다. 주제를 설명하는 강의, 원전을 소리 내어 읽고 풀이하는 강독(講讀), 그리고 그 내용을 두고 묻고 토론하는 강토(講討)가 이어졌다.

주강, 석강, 조강으로 이어지는 일정은 발표하고 박수 친 뒤 끝나는 학술대회와는 전혀 다른 호흡이었다. 한 사람이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같은 글을 함께 읽고 질문하고 답하고 다시 묻는 구조였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말의 태도였다.

강독을 맡으신 한재훈 선생님은 토론 중 예리한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하셨다.

“이 부분은 제가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것이면 다른 선생님들께서 바로잡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함께 고쳐가기를 청하는 태도.

강학은 지식을 겨루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자리라는 것을 그 한마디가 보여주었다.

개회식에서 서정학 병산서원 원장께서는 ‘온고지신’보다 ‘온고창신(溫故創新)’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옛것을 익히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위에서 새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날 하루동안 내가 본 강학의 분위기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처럼 들렸다.

류창해 서애 류성룡 선생 주손께서는 이번 강학회를 “선현의 뜻을 기리고, 함께 글을 읽으며 묻고 답하는 살아있는 배움의 공간으로 서원을 되살리는 자리”라고 하셨다. 돌이켜 보니 강학회는 꼭 그 말대로 흘러갔던 것 같다.

전거와 기억


첫 번째 강독에서는 이준(李埈)이 1630년에 쓴 「병산 존덕사 복향기」를 함께 읽었다. 서애 선생의 위패가 다른 서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존덕사로 돌아오게 된 경위를 기록한 글이다.

토론의 핵심은 의외로 현실적인 문제였다.

"한 고을에 같은 인물의 위패를 두 곳에 모실 수 있는가."

당시에도 이를 두고 논의가 있었고, 결론은 전례가 있으므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대목을 들으며 나는 조금 다른 생각도 했다.

우리는 늘 전거를 찾는다. 선례가 있는가를 묻는다. 공동체가 새로운 결정을 내리려 할 때 과거의 사례는 판단의 근거가 되고,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언어가 된다.

그러나 모든 전거에도 최초는 있었을 것이다.

복향 역시 당시에는 누군가가 처음 제안하고 결정한 일이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 오늘 우리가 다시 인용하는 전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전통은 과거에 있던 형식을 반복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공동체가 당대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기억 속에 축적해 가는 과정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복향기를 읽으며 결국 이 논의도 공동체가 무엇을 기억하기로 결정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패를 하나 모실 것인가, 두 곳에 모실 것인가를 넘어,

우리는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끝내 잊지 않을 것인가.

의례는 기억을 보관하는 형식이고, 공동체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결정하며 자신을 만들어간다.

복향기의 마지막 대목은 입교당 마루에 앉아 읽으니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見屛厓之落落,想先生所樹之不拔;
觀川流之混混,悟先生道體之無息。
玆可謂善學先生。


병산 절벽의 우뚝함을 보며 선생께서 세우신 바가 뽑히지 않음을 생각하고,
낙동강의 쉼 없는 흐름을 보며 선생의 도가 그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선생을 잘 배웠다고 할 만하다.

입교당에 앉아 있으면 이 문장은 비유가 아니라 풍경이 된다.
절벽과 강물이 그대로 교과서가 된다.

사진: 류한욱

물려받은 사람만 던질 수 있는 질문


강학의 밀도를 높인 것은 강단의 학자들만이 아니었다.

토론이 무르익을 때마다 문중 어른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문헌 속의 병산서원이 아니라, 평생 이 공간과 서애 선생의 유산을 곁에 두고 살아온 사람들의 질문이었다.

서울에서 먼 길을 내려오신 류영하 선생님은 서애 선생의 연보와 문인들이 쓴 행장에 정작 《징비록》에 대한 언급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문을 제기하셨다. 우리가 국보처럼 받드는 책이 언제, 어떤 경위로 쓰였는지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서애 선생의 글을 오래간 깊이 들여다본 분이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나 싶었다.

류한욱 회장님도 병산서원의 여러 기록과 전승을 둘러싼 질문을 이어가셨다. 복향이 이루어진 시기의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만대루는 서애 선생 당대부터 존재했는지, 아니면 후학들이 세운 것인지와 같은 문제였다.

류창해 주손께서도 문중에서 오래 전해 내려온 맥락을 덧붙이며 문답에 참여하셨다. 개회식 인사말에서 꺼내신 이야기가 있었다. 병산서원의 모체인 풍악서당에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왔을 때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감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이 전승이 역사 기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으니, 오늘 오신 학자 선생님들께서 기록을 찾아 알려주시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문중의 기억이 학계에 숙제를 내는 장면이기도 했다.

학계의 연구와 문중의 기억이 같은 마루 위에 앉아 서로에게 질문을 건네는 풍경이었다.

학자들은 문헌을 근거로 답했고, 현장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빈틈을 짚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완성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강학이라는 형식이 아니었다면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옥연서당과 낮은 경계


두 번째로 오래 남은 글은 서애 선생이 직접 쓴 「옥연서당기」였다. 옥연정사를 짓게 된 경위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자 했는지를 기록한 글이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산승 탄홍(誕弘)이 스스로 나서 십 년 동안 시주를 모아 서당을 지어드렸다는 이야기였다.

유학자의 서당을 스님이 지었다.

유학과 불교가 서로 완전히 등을 지고 있었다는 익숙한 관념과는 사뭇 다른 장면이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계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애 선생은 그 글 속에 이렇게 적었다.

人生貴適意,富貴何爲。
인생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하지, 부귀가 어찌 귀하리오.

중년에 벼슬길에 나아가 명성과 이익을 다투는 자리에서 이십여 년을 보낸 사람이, 고향의 강가에 작은 집을 짓고 남긴 문장이었다.

앞에는 깊은 못이 있어 배가 아니면 닿기 어렵고, 찾아온 손님도 응답이 없으면 돌아가야 했다는 곳.

서애 선생은 그곳에서 책을 읽고, 친구를 만나고, 산과 계곡 사이를 거닐며 뜻에 맞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리고 바로 그 공간에서 훗날 《징비록》이 쓰였다.

권진호 선생님의 병산서원 강의도 인상 깊었다. 병산서원을 아름다운 건축물 하나로 설명하지 않고, 교육 공간과 향촌 공동체, 학전과 운영 구조 속에서 읽어내는 이야기였다. 1614년 위판을 모실 때 몇몇 문중이 아니라 안동 유림 전체가 도감과 유사를 나누어 맡아 합력했다는 것. 병산서원은 처음부터 한 집안의 서원이 아니라 고을 공론의 서원이었다는 이야기가 와닿았다.

공간도 하나의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잃는 순간 껍데기가 된다.

입교당과 만대루가 오늘까지 남아 있는 이유도 건축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곳에 글을 읽고 질문하던 사람들의 시간이 함께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위 속의 사람들


첫날 내내 폭염이었다.

도포 안은 금세 땀으로 젖었다. 선풍기는 계속 돌아갔지만 더위가 쉽게 가시지는 않았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사람들이었다.

여든을 훌쩍 넘겨 보이는 원로 선생님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셨고, 발표가 없는 연구자들도 원전을 함께 읽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다. 전남대학교 호남학과에서도 몇 분이 발표 없이 견학만 하러 내려왔다고 했다.

병산서원은 서애 선생을 모신 서원인데, 겸암 선생의 종택인 양진당의 류상붕 대종손께서도 오셔서 자리를 지켜주셨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아우를 아끼는 형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여 유난히 각별하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누가 시켜서 앉아 있을 수 있는 더위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질문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석강, 그리고 새벽 세 시까지 이어진 야화. 마이크를 잡으신 건 류영하 선생님.

공식 강학이 끝난 뒤에는 야화(夜話)가 이어졌다. 낮의 강학에서는 정제된 언어가 오갔다면, 쉬는 시간과 밤에는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생각과 편안한 질문들이 나왔다.

낮에는 공동체가 함께 검토할 수 있는 말을 하고, 밤에는 아직 합의되지 않은 생각을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강학과 야화는 따로 떨어진 순서가 아니라 하나의 배움이 가진 두 호흡인지도 모른다. 공식 석강이 끝난 뒤의 이야기는 새벽 세 시 가까이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나는 밤 열한 시에서 자정 사이 병산서원을 먼저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남아 계신 분들이 떠올랐다.

병산서원의 방들은 크지 않고, 한여름에 여러 사람이 함께 묵기에는 넉넉하지 않다. 샤워 시설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어떻게 주무셨을까 싶었다.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 다시 입교당에 모여 조강을 이어갔다고 들었다.

나는 둘째 날 새벽 다시 제주로 돌아가야 해서 조강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입교당 상량문을 함께 읽는 자리였는데, 이번 걸음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다음 강학은 해를 넘기기 전에,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다시 열렸으면 한다.

돌아 흐르는 인연


개인적으로 반가운 만남도 있었다.

대학 시절 같은 영문과 강의실에 앉았던 친구 강경현 교수가 토론자로 와 있었다. 스무 살에 같은 수업을 듣던 친구를 스물다섯 해가 지나 입교당 마루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세월이 돌아 흐르는 방식이 꼭 하회의 강물 같았다.

도산서원 김병일 원장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알고 보니 장인어른의 중앙고 동기이자 오랜 친구분이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좁고, 인연은 생각보다 멀리 이어진다.

강학회라는 자리가 원전만 다시 만나는 곳은 아니었다. 오래된 사람을 새로운 자리에서 만나고, 알지 못했던 관계의 실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했다.

미래는 과거를 읽는 방식에서 만들어진다


돌아오는 길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마루에서 이루어진 일은 옛글을 읽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옛글로 오늘을 읽는 일이었다.

복향기는 위패를 어디에 모실 것인가를 기록한 글이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 글로 읽혔다.

옥연서당기는 집을 짓는 기록이지만, 어떻게 살아야 스스로 뜻에 맞는 삶인가를 묻는 글로 읽혔다.

같은 글도 시대마다 다른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하며 다음 시대의 선택을 만든다.

미래는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뿌리를 두되, 미래를 향해 새 가지를 뻗는 것.

고유축문의 '承先啓後 繼往開來'가 그 방향을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고유축문의 끝에는 이런 기원이 담겨 있었다.

講席恒新  絃歌弗替
강학의 자리가 항상 새롭게 이어지고,
글 읽고 토론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여 주소서.

병산서원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이번 강학회는, 오래 그 자리를 지켜온 서원이 다시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날처럼 느껴졌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오래 남는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를 마련한 류창해 운영위원장님과 보이지 않는 데서 고생하신 병산서원운영위원회 여러 분들.

지금까지 병산서원의 기억을 유지해주신 류한욱 전 하회마을보존회 이사장님과 류시역, 류종하 유사님.

먼 걸음으로 자리를 함께해 주신 양진당 류상붕 대종손님.

강학회를 다시 여는 고유문을 짓고 행사를 주관을 챙겨주신 류시용 유사님.

국립경국대 퇴계학연구소와의 협의를 이끌어 주셨다는 류한정 선생님.

여든이 넘은 연세에 먼 길을 내려와 끝까지 자리를 지키신 류영하 선생님.

강의를 맡은 황만기, 권진호, 이상호 선생님과 원전을 읽고 토론을 이끈 여러 학자들.

같은 마루에서 다시 만난 오랜 친구 강경현 교수.

그리고 입교당 처마 밑을 분주히 오가던 제비.

첫 강학이 어렵게 문을 열었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 문을 다시 닫지 않는 일일 것이다.

제비가 철을 따라 돌아오듯 정해진 한 해를 기다리기보다, 가능한 한 이른 때 다시 사람들이 입교당 마루에 둘러앉았으면 한다.

병산과 낙동강을 앞에 두고 글을 읽고, 묻고, 답하고, 낮에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밤까지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講席恒新  絃歌弗替
강학의 자리는 늘 새로워지고, 글 읽고 토론하는 소리는 끊이지 않기를.

2026년 7월 14일
제주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