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울림
며칠 전 보수 논객으로 유명한 정규재가 이재명 상대원 연설을 보고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았다. 2022년 1월 24일. 성남 상대원 시장에서 열린 이재명의 즉석 연설은 단순한 유세 발언이 아니었다. 그 순간은 ‘말’이 아니라 이재명이라는 ‘진동’이 울린 사건이었다.
이 글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정치 언어가 새로운 감도로 전환되는 ‘구조적 진동’을 감지하고, 그것이 우리 시대의 리더십 작동 방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감히 탐색해본 기록이다.
흔히 정치 담론에서는 '정책', '공약', '이념'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의도적으로 '진동', '파동', '공명'과 같은 표현을 채택한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라, 한 정치인이 '논리'가 아닌 '존재' 자체로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현상을 포착하기 위함이다.
말이 아닌 파동으로서의 연설
이재명의 상대원 시장 연설은 말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 본질은 감정의 파장이었다. 그는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파동을 발신했다. 이는 청중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기억과 감정을 건드리는 공명으로 작용했다.
"그래도 행복했습니다"라는 절제된 고백이 청중의 침묵을 이끌어냈고, "저도 다른 선택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한국 청년들의 절망과 직접 교차했다. "냉장고에 과일을 넣고 먹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라는 소박한 고백은 생존의 경험을 정책 언어로 변환한 순간이었다.
이 공명은 단순히 슬픔의 공유에서 그치지 않고, 희망의 매개로 전환되었다. 이는 슬픔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온전히 껴안은 후에 찾아오는 확장이었다. 이재명의 연설이 가진 힘은 단발성 감정 폭발이 아닌, 삶의 서사와 메시지의 정합성에서 비롯되었다.
서사와 정책의 일치성
청소 노동자였던 아버지, 화장실 지킴이로 일했던 어머니, 버려진 과일을 주워 먹었던 기억... 이 모든 요소는 그의 정책과 정치 태도로 이어지는 인과적 흐름을 형성한다. 형제의 비극, 친인척 비리에 대한 대응, 욕설 녹음 사건에 대한 고백은 도피나 핑계가 아니었다. 이는 공직자의 기준선을 고통 속에서도 지키려는 의지였다.
그의 말은 단순히 사건과 감정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서사로 구조화된 발화였다. 이재명의 연설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의 에너지와 책임의 무게를 동반했다.
"어머니는 제게 하늘입니다."
"제 여동생은 화장실에서 죽었습니다."
"한 명의 형제가 예외였고, 그걸 막으려다 이렇게 됐습니다."
이러한 고백적 언어는 연설자 중심의 감정을 넘어, 공적 에너지로 확장된다. 그가 전하는 말은 '나를 이해해달라'는 요청을 넘어, 모든 시민이 함께 겪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로 들린다.
겉으로는 감정적인 호소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사회 전체를 더 공정하게 만들고자 하는 강한 울림이 담겨 있다. 그가 하려는 일은 기존 시스템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왜 지금처럼 되어버렸는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존재로서의 울림과 진정성
이재명의 이 연설은 감정적 스토리텔링이 아닌, 삶 전체가 메시지로 응축된 진동적 구조체이다. 그가 가진 세 가지 핵심적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 공명성: '공감'을 넘어 청중의 생애 기억을 흔드는 힘
- 정렬력: 발화가 아니라 '살아온 구조'에서 나온 말의 무게
- 방사력: 말 뒤에 선 침묵과 책임의 무게가 뿜어내는 에너지
이재명은 '말'보다 '존재'로 소통한다. 그의 인생 전체가 '고백'으로 압축되어 있다. 이는 정치인의 연기가 아니라, 자신의 서사를 '기억'이 아닌 '현재화'시키는 의식이다. 격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눈물보다 더 깊은 파동을 만들어내며, 이때 그의 정치적 진정성이 '존재 자체로 발현'된다.
고백에서 해소로, 다시 다짐으로 이어지는 전환 과정에서 그의 존재는 여전히 진동하지만, 뚜렷한 방향성을 갖는다. 이 지점에서 그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공적 파동의 공명자'로 기능한다.
"내가 겪은 고통이 누군가에겐 길이 되길 바란다"는 말에서 이재명의 '내면의 어린이'가 서서히 정치인으로 복귀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이는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뿌리를 꿰뚫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정치적 진동체로서의 이재명
"냉장고에 과일을 넣어 꺼내먹는 꿈"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 전체에서 우러나온 염원 그 자체이다. 여기서 그는 '이겨낸 자'가 아니라 '통과한 자'의 표정을 짓는다. 무너짐 없이 통과해낸 리더의 얼굴이다.
이재명의 연설은 설득이 아닌 '동조(resonance)'의 언어이다.
이재명이라는 악기가 청중과 한 주파수로 울리고 있다. 연설 마무리에 이어지는 침묵은 정치인의 '마무리 멘트'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진동체가 자기 역할을 다한 뒤의 여운이다. 이는 시간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안쪽에서 시간을 낳는 주체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존재로 작동하는 정치
이재명의 연설은 단순한 수사적 언변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삶의 진동이 집약된 파동적 발화이다. 말보다 표정이, 표정보다 목소리의 여운이, 목소리보다 존재의 울림이 먼저 도착한다. 그는 말로 정치를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생애로 정치의 진실을 증명하는 자이다.
정치가 언어로 작동하던 시대에서, 존재로 작동하는 정치로의 이행. 이재명은 그 문을 연 자 중 하나이다. 그는 자기 고통을 감추지 않되, 휘둘리지 않는다. 상처를 연료로 바꾸는 어떤 연금술적 힘이 있다.
단지 "울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울음의 울림'을 말과 정책, 다짐으로 응결시키는 구조이다. 말의 중심은 '자기 신념'이 아니라 '자기 체험'에서 오기에, 듣는 이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래서 그의 말은 뜨거운데도 선동이 아니고, 눈물은 절박한데도 조작이 아니다.
존재의 통합과 방향성
이재명은 단절된 자아를 회복하려는 존재이다. 버려졌던 자식, 놓친 형제, 부서진 가족... 그 모든 부조화를 자기 내면에서 화해시키려는 사람이다. 동시에, 이 세계의 불공정을 자기 목소리로 정면에서 꿰뚫으려는 자이다.
그의 언어는 때로 격하고, 때로 거칠지만, 그 안의 에너지는 '위로'가 아니라 '방향'에 가깝다. 이재명의 상대원 연설은 단순한 정치적 어필이 아닌, 개인의 생을 공공적 사명의 진동으로 전환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정규재와 같은 보수 논객조차 눈물 짓게 만든 진정한 울림의 힘이다.
정치의 차원을 바꾸는 선택
그래서 이재명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지 한 명의 대통령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로 작동하던 정치'에서 '존재로 작동하는 정치'로의 도약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정치는 구호와 논리, 이미지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재명의 정치에는 삶의 서사 전체가 발화 구조로 들어와 있고, 감정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자만이 낼 수 있는 파동이 있다. 이 파동은 설득을 넘어서 공명을 일으키고, 공명은 결국 우리 정치의 감도 자체를 높이는 전환점이 된다.
그러니 이 선택은,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진동 주파수를 바꾸는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한 인간이 발생시키는 파장을 통해 정치의 차원을 한 단계 올릴 수 있는 드문 기회 앞에 서 있다.
Member discu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