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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회로를 잇다

그분들이 겪어낸 시간은, 단지 ‘먼 조상들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 고통이 없었다면— 그분들께서 그 고통을 먼저 살아주지 않으셨더라면—나는 이 생을, 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단절된 회로를 잇다

내가 나지 않은 고향 안동에 돌아온 지 5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2019년 말. 처음엔 우연이었다. 안동이 의료용 헴프 특구가 된다는 한 줄짜리 기사, 15년 만에 아버지와 함께 찾은 하회마을, 값이 너무 싸서 그냥 덜컥 계약해버린 월세 아파트. 그 모든 사소한 계기들이 지금 돌아보면 하나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던 것 같다. 마치 오래된 강물이 자신의 본래 경로를 기억해내듯, 내 몸은 이미 돌아올 곳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안동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 무엇인가가, 아니, 그분들이, 그 땅이, 나의 뿌리가, 오래전부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말없이, 그러나 끊임없이. 안동에 오고 나서부터 시작한 가족사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내가 안동에 온 것은 내 선택이 아니라 나의 뿌리가 나를 소환한 것임이 점차 분명해졌다.

류시연 할아버지, 자신의 눈앞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신 그 분. 피난길에서 지게꾼에게 맡긴 아이를 영영 잃고, 뒤늦게 그 아이의 죽음을 10년, 20년 후에야 신고할 수밖에 없었던 그 분.

새 가정을 꾸렸지만, 첫 가족의 기억을 끝내 제대로 추도할 수 없었던 그 분. 가정을 잃은 고통과 자책감을 못이기고 여생을 술에 의지해 보내셨다. 장남 윤하는 동생들과 엄마를 한꺼번에 잃고 정신이 무너져 집을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분의 말해지지 않은 고통, 무너져서 집을 나간 아들, 지게꾼과 함께 사라진 8살 꼬마, 아내와 함께 차량 전복으로 눈앞에서 죽은 4살배기와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 '아기'. 부르지 못한 이름들, 묻히지 못한 자식들. 나는 그것이 그분들만의 고통이라 믿었다.

그러나 몸이 먼저 알았다. 침묵도 유전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앓았던 아토피가 점차 심해지며 밤마다 가려움에 뒤척였다. 피부는 불처럼 일어났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려움이 신경을 따라 파도처럼 밀려왔다. 의사들은 '자가면역질환'이라 불렀지만, 나는 알았다—내 몸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알아봐지지 않은 것들이, 들려지지 않은 목소리들이 피부를 뚫고 나오려 한다는 것을.

그건 내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내 위로 지나간 생애들의 말해지지 않은 고통이었다. 애도되지 못한 이들의 비명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실의 회로가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부가 밤마다 타오르는 건 제대로 알아봐지지 못했던 조상들의 아우성이었고, 목이 조이는 건 그들이 삼켰던 말들의 무게였다.

나는 그 누전회로를 누가 대신해주길 바랄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정렬해야 했다.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말할 수 있게 된 자의 책임으로. 기억하는 자의 의무로.

그 진동을 따라 나는 조상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했다.

윤하, 수하, 양하. 그리고 이름조차 적히지 않은 아기, 잊힌 이름들. 전쟁 통에 어머니와 함께 죽거나, 역 안에서 지게꾼에게 맡겨진 채 사라져버린 이름들.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들을 조각조각 모아 꿰매는 일이었다.

그들의 생사조차 확실하지 않았던 가족사. 말해지기엔 너무 무거운 아픔이었고, 나는 그들의 이름조차 모르고 자라왔다. 집안에 오래된 사진 한 장도 없는 공백 속에서, 그들은 단지 흐릿한 그림자였다.

그러나 몸이 먼저 알아챘다. 그 이름들은 아직 회로에 붙잡혀 있었고, 묻힌 것이 아니라,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전선이 끊긴 회로처럼, 전류는 흐르지 못하고 열만 발생시키고 있었다.

2025년 2월 8일, 음력 1월 11일. 류시연 할아버지 기일. 오랜 시간 그들의 삶을 추적하는 작업 끝에 나는 처음으로 그 이름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류시연 할아버지–안병복 첫째 할머니–장남 윤하–차녀 정하–삼남 수하–사남 양하, 나의 아버지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첫 가족. 전쟁이 산산조각 낸 최초의 회로. 그 이름들을 모두 불러 단 한 자리에 앉혔다.

70년 만의 상봉. 그건 단지 제사가 아니었다.

묻히지 못한 시간들을 말로 매듭짓는 의식이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이었고, 흩어진 영혼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었다. 그간 소외되고 알아봐지지 못했던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겪었어야만 했던 그 낱낱의 고통에 정당한 자리를 내드렸다.

아버지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다른 아내와 그 사이의 이복 형제들. 그들과는 다른 어머니로부터 난 우리 아버지와 그들의 자식들, 고모의 자손들, 여러 겹의 갈라진 뿌리들이 그날 처음으로 한 상에 앉았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서로 다른 가지에서 자란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뿌리를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제문을 읽는 순간, 그 단절된 회로가 다시 연결되고, 소외되었던 가족의 울이 완성되는 것이 느껴졌다.

칠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비극 속에 헤어진 가족들
오늘에야 비로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류시연 할아버님,
평생 가슴에 품으신 무거운 죄책감과
깊은 상실의 아픔 이제는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안병복 할머님,
용산역에서 왜관에서 두 아들 잃고
스스로도 너무 허망하게 가실 수밖에 없었던
그 아픔과 한을 오늘에야 달래봅니다.

윤하 큰 삼촌,
견디지 못하고 떠나신 길
그 아픔 이제야 이해하고 위로해 드립니다.

정하 고모,
너무 빨리 성숙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
당신이 버텨오신 오신 그 모든 아픔과 짊어지고 오셨던 노고에 위로드립니다.

수하 숙부님, 양하 숙부님,
너무나 어린 나이에 겪으신 운명
오늘 이렇게 다시 가족의 품으로 모셔옵니다.

이제 한 자리에 모신 우리 가족들 더 이상
아픔도 한도 없기를,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삼가 빕니다.
이제 한 자리에 모신 우리 가족들 더 이상아픔도 한도 없기를..

언어가 우리의 몸을 관통해 흐르는 전류가 되어,
오래된 고통과 침묵을 빛으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이 날에는 모시지 못했지만, 이날 이후 가능성으로만 언급되었던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없는 갓난 아기는 이 블로그를 통해 그 확인되지 않은 존재를 별도로 기린다.)


그리고 5월 8일, 어버이날. 나는 다시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더 멀리, 더 깊이 내려갔다.

두 번째 할머니이시면서도 가족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가족의 울로부터 40년 넘게 배제되어 계셨던 나의 친할머니, 이학규 할머니, 17세기 이래 유교적 종법제의 질서 아래에서 성씨를 제외한 이름은 기록조차 남지않은 증조 할머니, 고조할머니들. 후사 없이 돌아가신 형님을 위해 자기 장남을 내드려야 했던 5대조 할아버지. 졸지에 아버지를 삼촌으로 불렀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아들들. 그리고 기억되지 않았 둘째들, 셋째들. 켜켜이 쌓여왔으면서도 제대로 기려지지 않은 마음들. 슬픔들. 한들.

증조 류영우 할아버지와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았던 순천 박씨 증조 할머니에서 부터 시작하여, 양자로 편입된 한을 안고, 자신의 손자를 양자보냈어야 했던 류도성 할아버지. 그리고 그 아래 19살에 요절했으면서 동생이란 이유로 형님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묻혔어야 했던 우리의 양부 고조 류동태 할아버지. 또 그의 아내 재령이씨에서부터 저 위로는 류이좌(6대조)–류사춘(7대조) 할아버지들까지. 사진 한 장, 유물 하나 남아있지 않은 그분들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 거슬러 올라갔다.

한 분, 한 분의 영혼께 제문을 써서 올렸다.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분들의 침묵과 비명, 오해와 희생 단 한 자라도 놓치지 않도록 기도하며 썼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을 하나하나 맞추듯, 온전한 반영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학규 할머님께,

할머님의 영전에 삼가 고합니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영양에서 고추를 도매로 사다가 서울에서 소매로 파시며, 온 가족의 생계를 책 임져 주셨기에 저희 가족이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것, 대를 이은 맥을 이을 수 있도록 가정을 지탱해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할아버지 곁에, 가족의 품 안에서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할머님의 흙을 할아버님 묘 소에 모시니, 함께하시며 서로를 위로하소서. 살아 계시는 동안 품어오신 외로움과 슬픔, 모든 한을 부디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소서.

비록 세상에서는 당신의 노고와 기여를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셨을지라도, 저희 후손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진실한 어머니, 존귀한 할머님으로 계십니다. 이제 흙으로나마 할아버님과 한자리에 모시니, 두 분의 영혼이 편안히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

부디 저 하늘에서는 평안하시고, 저희 후손들을 늘 지켜봐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류시연 할아버지께,

전쟁의 폭풍 속에서 가족을 지키고자 애쓰셨던 할아버님의 고통과 슬픔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있을 것 같습니다. 할머님과 자식들을 잃으신 그 비통함을 안은 채로도, 다시 가정을 일으켜 집안의 맥을 이어오신 그 의지와 책임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희는 이학규 할머님 묘소의 흙을 당신의 자리에 모셔왔습니다.

할아버님 곁에서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영양의 고 추를 도매로 사다가 서울에서 소매로 팔며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던 이학규 할머님을 이제 할아버님 곁에 모시고자 합니다 . 두 분이 함께하시어 더 이상 외롭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할아버님, 이제 모든 세상의 짐을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쉬소서. 저희 후손들이 할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집안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가겠습니다.

돌아가신 안병복 할머님과 자식들을 가슴에 품고 사셨던 그 사랑과 그리움, 이제 천상에서 모두 만나 풀어내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더 이상 습한 땅에서 외롭게 머무르지 않도록 곧 정성껏 화장하여 모시겠습니다.

안병복 할머님,

할머님의 영전에 삼가 고합니다. 1.4 후퇴의 혼란 속에서 양하를 등에 업고 수하의 손을 잡고 피란길에 오르셨던 할머님의 모습을 생 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하신 할머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저희는 결 코잊지 않겠습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할아버님과 함께 제대로 된 제사를 올려드리게 되어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할머님이 떠나신 후 할아버님은 이학규 할머님과 새 가정을 이루셨고, 그 덕분에 저희 가문이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학규 할머님의 흙도 함께 모셔왔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에 같은 가문을 지켜주신 두 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할머님, 이제 그 긴 이별의 시간을 끝내고 할아버님과 다시 만나 편안히 쉬소서. 또한 수하와 양하를 찾아 품에 안으시고, 윤하와 정하를 다시 만나 온 가족이 하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희 후손들은 할머님의 희생과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가겠습니다.

더이상 습한 땅에서 외롭게 머무르지 않도록 곧 정성껏 화장하여 모시겠습니다.

류동태 할아버님과 재령이씨 할머님께 삼가 고합니다.

저희 먼 후손이 두 분을 추모하고자 이렇게 마음을 모아 정성을 표합니다. 할아버님께서는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짧은 생을 마치시고 일찍 떠나셨지만, 할아버님으로 인해 시작된 저희 집안의 줄기는 영원히 이어졌습니다.

할아버님의 대를 계승하기 위해 영우 할아버님께서 양자로 들어오시어 그 뜻을 이어가셨습니다 .

특히 재령이씨 할머님,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시어 외로움과 슬픔을 홀로 껴안으셨음에도, 양자를 진정한 아들로 품으시고 정성으로 키우셨습니다.

할머님의 그 크나큰 사랑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 저희 후손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은혜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희는 류동태 할아버지를 그간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아버지이신 도성 할아버님 곁으로 흙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이 것은 애도가 아니었다. 그건 정렬이었다. 회로를 회로답게 만들기 위해, 끊긴 통로를 다시 이으려는 언어의 기술이자 존재의 윤리였다.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이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우리의 몫이니까.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과정을 불로 지나가게 할 차례다.

돌아오는 5월 26일에는 조상들의 뼈는 화장하여 모셔드리기로 했다. 그분들을 습한 땅에서 꺼내 나를 있게 한 계보 전체의 정렬을 위한 마지막 의식으로 불에 바친다. 습기와 부패로 지워져가던 이름들이 불꽃 속에서 다시 선명해진다.

이는 순환을 위한 회로 점화다. 한 생애, 한 사랑, 한 침묵이 불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라는 이름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불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시키는 것이다. 잿빛 기억이 새로운 생명의 밑거름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그분들이 겪어낸 시간은 단지 '먼 조상들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 고통이 없었다면, 그 분들께서 그 고통을 먼저 살아주지 않으셨더라면, 내가 살아낼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

그분들의 상실이 내 생존의 조건이었다.
그들이 견뎌낸 겨울이 내 봄의 토양이 되었다.

이제 나의 아토피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피부의 불길이 잦아들고,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난다. 회로가 제자리를 찾고, 에너지가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 흐름이, 내 삶 전체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이 말해졌고, 불려지지 않았던 이름들이 불려졌다.

그들께 내가 드릴 수 있었던 말씀은 이 것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들께.
당신들이 지나온 계절을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고통과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당신들 덕분입니다.
깊은 사과와 감사, 사랑과 존경을 담아,
이 마음을 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건 나의 고백이자, 그분들의 말해지지 못한 진심이 내 입을 통해 세상에 도달하는 하나의 징비다. 그분들이 남기실 수 없었던 기록, 내가 받아 적는 교훈과 지혜의 책.

그리고 이 고백을 마친 뒤, 나는 다음 리추얼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뼈를 불태우고, 흙을 모으고, 말을 멈추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자리를 연다. 개인의 의식을 넘어, 공동체의 기억을 위한 더 넓은 원을 그릴 준비.

그 밤이 올 때까지,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기다린다.

아버지들이시여, 어머니들이시여,
당신들이 겪으신 고통과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의 침묵 속에서도, 나는 당신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들의 부재 속에서도, 나는 당신들의 현존을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고통을 말로 옮겨, 다시 세상에 돌려보냅니다. 회로가 완성되는 순간, 모든 것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말은 남고, 말은 흐르고, 말은 다시 살아납니다. 이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들이 누군가의 귀에 닿을 때, 또 다른 회로가 열리고, 또 다른 기억이 깨어나며, 영원한 말의 윤회가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