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자기 배신은 뇌를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신경계는 말하지 못한 진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리고 왜 침묵을 깨는 것이 생물학적인 용기인가.
원글 저자: 베라 하트 (Vera Hart, MD, PhD)
의학 박사이자 철학 박사. 그녀는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경계에서 '양심'과 '침묵'이 인간의 신경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특히 권력, 두려움, 그리고 도덕적 용기가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형성하는지 탐구하며, 트라우마 생존자와 진실을 말하는 이들(Truth-tellers)을 위한 치유의 글을 쓰고 있다. 현재 서브스택(Substack)과 인스타그램(@verahartmdphd)을 통해 '도덕적 용기의 생물학'에 관한 통찰을 나누고 있다.
원글 링크: https://verahartmdphd.substack.com/p/the-price-of-silence-what-self-betrayal
침묵의 대가: 자기 배신이 뇌에 미치는 영향
침묵은 어디에나 있다. 직장에도, 가정에도, 법정에도, 그리고 국가 안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공기처럼 빽빽하고 돌덩이처럼 무거운 압력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진실에는 대가가 따르며, 말은 처벌을 부를 수 있고, 때로는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의사로서 나는 매일 그 풍경을 목격한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혹은 결혼 생활이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겉보기엔 매끄럽지만 안쪽은 삭아 너덜너덜해진 천으로 삶을 간신히 기워내면서 말이다. 침묵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음(nothing)'이 아니다. 침묵은 명백한 선택이며, 모든 선택이 그렇듯 반드시 청구서가 날아든다.
수년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침묵을 택한 저들은 나보다 행복할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장단을 맞추며, 진실을 벌하는 시스템에 순응함으로써 그들은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지켜냈을까? 그들의 침묵은 보호막이었을까, 아니면 아주 느린 형태의 항복이었을까? 그들은 가족을 붕괴로부터 구해낸 것일까, 아니면 자녀들에게 '감히 말하려 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절망을 가르친 것일까?
자기 배신의 생물학
우리의 뇌는 침묵을 '안전'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고통과 도덕적 갈등을 감지하는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ACC)은 우리가 스스로를 배신하는 순간 붉게 타오른다. 이곳은 무리에서 배제되거나 거부당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동일하다. 뇌는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타협을 구별하지 못한다.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행위는 자신의 신경계 내부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생존 본능과 인간의 존엄(integrity) 사이의 전쟁이며, 몸은 그 전쟁의 결과를 낱낱이 기록해 두었다가 수년 뒤 증상으로 청구서를 내민다. 불안, 우울, 자가면역 질환 같은 폭풍으로 말이다. 바깥세상이 아무리 고요해 보여도, 침묵은 신경계에 빚을 남긴다.
신경과학은 우리의 영혼(psyche)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해 준다. 억압은 생물학적으로 매우 값비싼 행위다. 감정을 억누를 때 전두엽은 끊임없이 변연계(limbic)의 신호를 틀어막아야 하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인지 에너지가 소모된다. 코르티솔(Cortisol)은 혈관을 떠돌고, 면역 체계는 염증 반응을 일으키며, 내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내부수용 감각 경로(interoceptive pathways)는 점차 무뎌진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이 무뎌짐을 평화로 착각한다. 경보 장치가 타버려서 조용한 것뿐인데 말이다. 침착해 보이는 겉모습은 종종 탈진의 다른 이름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타협 형성(compromise formation)이라 부른다. 금지된 진실은 소속감을 유지하기 위해 급조된 가짜 이야기 아래 묻힌다. 진정성을 희생한 대가다. 의식은 이것을 신중함, 전문성, 혹은 성숙함이라 포장하지만, 무의식은 이것을 생존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계약의 대가는 자발성, 욕망, 그리고 활력의 점진적인 상실이다. 자아는 자신의 심장 박동보다 반박자 뒤쳐져 살게 된다.
침묵의 비용 vs 진실의 비용
침묵의 비용은 숨어 있을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깨진 평화를 지키려 말을 삼킬 때, 혹은 부당한 일이 벌어진 방에서 발언 대신 정적을 택할 때, 몸은 그 값을 치른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치솟고, 미주신경(vagus nerve)은 긴장하며, 전대상피질은 자동차 계기판의 경고등처럼 붉게 켜져 있다. 아무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고등이다. 침묵은 직장, 결혼 생활, 건드리면 부서질 듯 위태로운 합의 같은 '삶의 외벽'은 지켜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내면의 구조를 갉아먹는다. 기초가 텅 비어버릴 때까지 그 침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침묵하는 이들은 겉보기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피로와 질병, 단절, 그리고 쇠에 녹이 슬듯 자신을 갉아먹는 체념을 짊어지고 산다.
반면, 진실의 비용은 즉각적이고 선명하다. 말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일어선다는 것은 표적이 됨을 의미한다. 침묵 위에 세워진 시스템에서 진실을 말하는 이들은 처벌받는다. 때로는 즉각적으로, 때로는 잔혹하게. 경력은 위태로워지고, 평판에는 흠집이 나며, 가족은 폭로의 무게를 견디느라 휘청거린다. 외부적인 손실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진실을 뱉는 순간, 신경계의 무언가가 제자리를 찾는다. 몸은 더 이상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전대상피질은 잠잠해지고, 편도체(amygdala)가 두려움에 요동칠지언정 그 방향은 안으로 꼬여들지 않고 바깥을 향해 정렬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바깥을 잃는 대신 안의 온전함을 지키는 일이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잔인한 역설이다. 침묵과 진실 모두 대가가 따르지만, 지불하는 화폐가 다르다. 침묵은 '자아(Self)'를 지불하라 하고, 진실은 '바깥의 안정'을 지불하라 한다. 하나는 안에서부터 썩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밖에서부터 흔들어댄다. 질문은 "비용이 드느냐"가 아니다. "당신은 어떤 비용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느냐"이다.
도덕적 상해(Moral Injury)의 관점
프로이트는 억압을 문명의 초석이라 불렀지만, 그조차도 지나친 억압은 병을 부른다고 인정했다. 후대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를 도덕적 상해(moral injury)로 정의했다. 집단과의 조화를 위해 자신의 윤리적 핵심을 위반할 때 생기는 병이다. 현대의 직장에서 도덕적 상해는 공개적인 갈등을 대체했다. 환자나 직원, 그리고 진실 자체를 해치는 결정 앞에서도 사람들은 침묵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저항이 아닌 신체적 고통(somatic distress)으로 치러진다.
침묵은 내면화된 일종의 초자아(superego)다. 그것은 수치심을 도구 삼아 우리를 훈육하며, 양심이 아닌 시스템에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 복종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아(ego)는 약해지고, 결국 자신의 침묵이 전략적인 것인지 병적인 것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치료와 철학은 같은 질문 앞에 마주 선다. 인간성을 지워버린 환경에서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편적인 질문
사람들이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절박하게 묻는 질문이 있다. 우주는 과연 침묵을 벌하고 진실에 상을 주는가? 아니면 그저 무관심할 뿐인가? 나는 단순한 인과응보를 믿지 않는다. 침묵을 지킨 덕에 직장과 가정을 무사히 지킨 사람들을 보아왔고, 반대로 입을 연 대가로 모든 것을 뺏긴 사람들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침묵한 자들이 안에서부터 시들어가는 모습 또한 보았다. 수년 간 삼켜온 진실과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질병들로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우주는 분수에 동전을 던지듯 소원을 들어주지도, 깔끔한 인과율로 벌을 내리지도 않는다. 다만 우주가 무자비할 정도로 일관되게 하는 일은, 각자가 선택한 길의 결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침묵은 겉을 지키지만 속을 타협하게 만들고, 진실은 겉을 흔들지만 속을 정렬시킨다.
내가 '정렬(alignment)'을 말할 때, 그것은 평화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과 신경계, 전대상피질이 인식하는 '일치감(coherence)'을 뜻한다. 내 말과 내 존재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는 상태다. 이 일치감이 보복이나 잔인함으로부터 당신을 구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배신이라는 느린 부식으로부터 당신을 구한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 그 보복의 시간을 견뎌내고 나면, 당신은 깨닫게 된다. 뺏긴 것은 안전이 아니라, 안전하다는 환상뿐이었음을.
개인적인 결산
나는 이 진실을 이론이 아닌 내 삶의 이력으로 겪어냈다. 나는 미국 최대 병원 시스템 중 하나에서 내부고발자가 되었다. 안전과 진실성, 그리고 관료적 침묵 아래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은밀한 피해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건강은 나빠졌고, 평판은 공격받았으며, 한때 진실을 중요시한다던 조직은 진실을 위협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내 신경계는 알고 있었다. 목소리를 낸 그 해는, 내 몸이 침묵의 대가로 나를 벌하기를 멈춘 해였다. 수년간 가슴을 짓누르던 고통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승리는 아니었으나, 일치감이었다.
나는 이 과정을 미화할 생각이 없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나를 거의 파괴할 뻔했지만, 동시에 나를 구원했다. 다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갈등이나 순교자 흉내를 즐겨서가 아니다. 모순 속에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내 몸이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한번 깨어난 신경계는 침묵이라는 혼수상태로 다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맺음말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부재(absence)도 아니다. 침묵은 하나의 행위이며, 모든 행위가 그렇듯 몸과 영혼을 조각한다. 알고 있는 진실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겉보기에 아무리 삶이 멀쩡해 보여도 당신을 안에서부터 삭게 만든다. 반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내면이 아무리 온전해도 바깥세상에서 부서질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어느 길도 공짜는 없다. 우리 각자가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부서짐을 견딜 수 있고, 어떤 종류는 견딜 수 없는가.
어쩌면 이것이 우주의 숨겨진 설계 방식일지 모른다. 처벌도 보상도 아닌, 정렬(alignment).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 몸이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 진실이 몰고 오는 격동을 견뎌내는 것. 왜냐하면 그것만이 당신을 썩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격동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배신이 없는 상태,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저 내가 살아낸 것을 말할 뿐이다. 침묵은 평화가 아니다. 침묵은 가짜 안전을 얻기 위해 몸이 지불하는 빚이다. 진실은 쉽지 않지만, 자유를 살 수 있는 유일한 화폐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대가가 견딜 수 없이 무겁게 느껴질 때면,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침묵의 대가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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