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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정과 자기 몫의 고통에 관하여

승인은 묻는다. 너는 충분히 잘했는가. 인정은 말한다. 나는 너를 본다. 승인은 조건이 바뀌면 철회될 수 있다. 인정은 잘했고 못했고를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이 거기에 있음을 받아들인다. 승인이 성과에 대한 것이라면 인정은 존재에 대한 것이다.
미운 정과 자기 몫의 고통에 관하여
세한도(歲寒圖).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 강의를 듣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강연자는 한국이 앞으로 세계의 선도국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한 2/3, 이런 바람 든 소리를 믿으면 안 된다는 경계가 한 1/3 동시에 올라온다.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한국 사람들은 허구한 날 싸우는데.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원수 되고, 인터넷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목소리도 크고 말도 세다. 누구 하나 조금 나서기라도 하면 흠부터 잡는다.

그런데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안전하다는 것이다. 밤늦게 혼자 걸어도 되고, 카페에 노트북을 두고 화장실에 가도 된단다. 당연한거 아닌가? 근데 왜저렇게까지 놀라지?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서로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함께 사는 공간은 그래도 꽤 안전한 편이니 말이다.

왜 그럴까.

내 생각에 그것은 아마도 미운 정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미운 사람에게도 정이 든다. 욕하면서도 같이 간다. 다시는 안 본다고 해놓고 경조사가 생기면 나타난다. 좋아서도 아니고 용서해서도 아니다. 너무 오래 함께 살아서 상대가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부모님이 딱 그렇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엄마는 아버지(를/한테) (삐—)하고, 아버지는 (삐—)이/가 (삐—)하다고 엄마(를/한테) (삐—)한다. 엄마는 아버지가 (삐—)하고, (삐—)도 하고, (삐—)할 것 투성이고, 아빠는 엄마의 (삐—)가 (삐—)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견디다 못해 이내 터져버린 날들도 있었다. (삐—)했던 일도 있었고, (삐—)하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서로 저렇게 저런데 왜 같이 사는 걸까. 이혼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47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도 이혼 안 하고 잘 사신다. 이젠 별로 싸우시지도 않는다. 이젠 지쳤는지, 아버지는 엄마가 긁어도 대꾸도 안하기로 하신 것 같았다. 까치의 울음소리를 한귓등으로 넘기는 호랑이처럼. 서로를 향한 불만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 불만이 관계의 끝이 되지는 않았다.

이런 걸 보면 미운 정이란 게 꼭 아름답기만한 감정만은 아니다. 사랑과 미움이 잘 정리되지 않은 채 한 몸에 남아 있는, 다소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는 그런 무엇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긋지긋한 그 무엇 속에 중요한 것이 있다. 평가가 나빠져도 관계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차마 그의 존재까지 취소하지는 못하는 그런 것.

어쩌면 한국 사람들은 서로에게 친절해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를 차마 완전한 타자로 만들 수 없어 함께 사는 것이다.

물론 미운 정도 정이라고, 미운 정 때문에 떠나야 할 관계를 떠나지 못해서는 안된다. 세상엔 정말 미운 정이라는 말만 가지고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그런 관계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갈등을 관계의 끝으로 볼 것인지,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로 볼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말이 떠오른다. 중국어의 不错. 글자 그대로 읽으면 틀리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꽤 괜찮다, 잘했다는 뜻으로 쓰인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작은 일에도 amazing, awesome이 쏟아진다. 중국어의 不错은 잘한 사람에게도 일단 틀리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듯하고, 캘리포니아의 awesome은 한국인의 눈에는 별건 아니거나 당연한 일에도 놀랍다고 칭찬이 쏟아진다. 왜 어떤 문화에서는 칭찬이 꽉꽉 눌려있고, 어떤 문화에서는 칭찬이 남발될까.

그것은 존재의 디폴트가 다른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관계와 자리가 먼저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매번 말로 확인받을 필요가 적다. 잘하면 말없이 알고, 못하면 대놓고 욕한다. 욕을 먹었다고 당장 공동체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말은 안했지만, 디폴트가 너의 자리가 이미 있다는 걸 가정하기 때문에 말을 안하는 거다. 반면 서로의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사회에서는 내가 너를 보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주고받아야 한다. 칭찬은 평가이면서 동시에 상대를 잠시 존재하게 해주는 작은 승인이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서는 디폴트 값이 서로의 자리가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라 없던 데서부터 만들어야 하는 거기 때문이다.

나도 오랫동안 그 승인의 문법을 배웠다. 실리콘밸리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자기 어필을 배워야 했다. 겸손이 미덕이 아닌 곳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왜 특별한지 명확하게 말할 줄 알아야 했다. 낯선 사람들이 모인 세계에서 상대는 내 사정을 알아서 헤아려주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것을 정확히 설명하는 능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문법을 오래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하나의 스타트업이 된다. 나는 늘 투자받아야 하고, 매력적인 서사를 제시해야 하며, 지난 성과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오늘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내일은 잊힌다. 어제 받은 박수는 오늘의 자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존재는 끝나지 않는 피치가 되고, 삶은 끝나지 않는 데모데이가 된다. 모두가 손을 든다. 모두가 서로에게 amazing을 건네지만, 그 말이 멈추면 갑자기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적막이 찾아온다. 관심을 받아야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관심이 끊기는 순간 존재도 흔들린다.

그러나 어느 순간 조금 달라졌다. 내가 더 유명해져서도, 누구보다 성공해서도 아니었다.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조상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하회와 안동의 오래된 관계 안에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더듬으면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로 발명하기보다 이미 이어져 있던 것 속에서 내 자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설명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승인은 묻는다. 너는 충분히 잘했는가. 인정은 말한다. 나는 너를 본다. 승인은 조건이 바뀌면 철회될 수 있다. 인정은 잘했고 못했고를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이 거기에 있음을 받아들인다. 승인이 성과에 대한 것이라면 인정은 존재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최초의 관계에서 이 인정을 배운다. 아이는 잘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났기 때문에 품어진다.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지만 자리가 주어진다. 그 최초의 자리가 안전할 때 아이는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실패해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이 모험할 힘을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자리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다. 사랑받으려면 착해야 하고, 인정받으려면 성취해야 하고, 버려지지 않으려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때부터 존재와 자격이 붙기 시작한다. 잘되는 일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고, 잘못되는 일은 내가 무언가 잘못된 존재라는 증거가 된다.

고통은 가장 잔인한 시험지가 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인류는 오랫동안 고통을 자격의 언어로 해석해왔다. 신의 벌, 업보, 죄, 무능, 노력 부족. 종교적 인과응보가 약해진 뒤에도 현대의 능력주의가 그것을 세속적으로 이어받았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할 자격이 있었고, 실패한 사람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네가 겪는 고통은 네 존재의 근원적 자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말은 고통에 원인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잘못된 선택이 고통을 만들 수 있다. 타인에게 해를 끼쳤다면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원인과 책임을 아무리 정확히 따져도 그것이 한 존재가 여기 있어도 되는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고통은 네가 열등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반대로 고통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더 위대한 것도 아니다. 고통은 판결문이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며, 이해와 돌봄과 때로는 책임을 요청하는 현실이다.

치유는 잃어버린 자격을 되찾는 일이 아니다. 그 자격이 애초에 상실된 적 없음을 깨닫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역설이 생긴다. 철이 들며 존재의 자격이 고통과 무관하다는 것을 배운 사람은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 고통이 자신의 근원적 자격미달에 대한 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할 필요도, 남에게 떠넘길 필요도 줄어든다.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실수와 잘못을 인정한다고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변명하지 않고 책임질 수 있다. 실패했다고 존재가 취소되는 것이 아니므로 실패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마땅히 감내해야 할 자기 몫의 고통을 책임이라고 부른다. 책임은 벌이 아니다. 내가 나쁜 존재이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도 아니다.

책임이란, 내가 맺은 관계, 내가 맡은 자리 때문에 내 앞에 놓인 현실 가운데 남에게 넘겨서는 안 되는 몫이다.

내가 만든 고통은 내가 수습해야 한다. 내가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미 내 삶 안에 들어온 고통은 나를 탓하지 않으면서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본래 다른 사람이 감당해야 할 고통까지 죄책감 때문에 대신 짊어져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몫을 남에게 넘기면서 그걸 인내라 부르는 일은 책임을 지는 태도가 아니다. 책임의 왜곡이다.

자기 몫을 감당하는 능력만큼 자기 몫이 아닌 고통을 돌려보내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래서 고통을 많이 감당하는 사람이 더 높아진다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귀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의 자격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다만 현실을 품는 그릇은 넓어질 수 있다. 내가 무너지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진실이 많아질수록, 내가 떠넘기지 않고 책임질 수 있는 결과가 커질수록 사람은 윤리적으로 깊어진다.

높은 자리는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공동체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먼저 감당하는 자리다. 지도자는 결정에서 생긴 고통이 가장 약한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도록 막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른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아픔을 약한 사람에게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 처음의 미운 정으로 돌아가 보자. 미운 정 안에는 이미 희미한 앎이 들어 있다. 네가 밉다고 해서 내 안의 네 자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앎. 우리는 그 앎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래서 욕하면서도 밥을 차렸고, 싸우면서도 장례에는 갔고, 원망하면서도 아픈 사람을 내버려두지는 못했다. 내 부모님도 그랬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만큼 가장 잘 긁으면서도, 누군가 쓰러지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미운 정은 말한다. 네가 밉다고 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책임은 말한다. 네 자리가 남아 있는 만큼 네 몫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문득 안도한다. 어느덧 건너왔구나. 아버지를 견뎌준 엄마의 미운 정과, 엄마를 견뎌준 아버지의 미운 정이. 두 분이 서로에게 무엇을 참아왔는지 나는 다 알지 못한다. 삐 소리로 지워둔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이제는 굳이 묻고 싶지 않다. 다만 그 견딤이 없었다면 내가 돌아갈 집도 없었을 것이다. 47년 동안 서로의 자리를 끝내 지우지 않은 두 사람 덕에, 나는 실패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 밤에는 자기 전에 떠올려 보려 한다. 내가 누구를 견뎠는지가 아니라, 누가 나를 견뎌주었는지를. 나도 누군가에게는 틀림없이 긁는 쪽이었을 테니까. 밉다면서도 끝내 내 자리를 지워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2026.8.9. 초고.

사족)
이 글의 첫 독자는 어머니였다. 저녁 식탁에서 이 글을 다 읽으신 어머니는 내가 팔천 자로 쓴 내용을, 엄마는 김치 한 젓가락으로 요약하셨다.

"오래 두면 다 맛있어지잖아.

그게 미운 정이야.

지난 세월이 꿈같아. 아버지가 화나서 문 쾅 닫고 들어갔을 때 아팠던 건 있었지만,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없고. 몇 번 그랬었지, 이 정도지."

본문에서 내가 차마 쓰지 못하고 삐 소리로 지운 사십칠 년의 내용을, 정작 그 세월의 주인은 그렇게 처리하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