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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느라 바빴던 나라를 위하여

숫자는 남았지만 사람은 사라졌다. 진영은 남았지만 생애는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기 전에 서로를 몰랐다.
살아남느라 바빴던 나라를 위하여
노순택, 「망각기계」 연작, 2006–2007. 한 번 있었던 사람이 두 번 지워지지 않도록.

한국 집단 감정사 시론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군인이 국회로 들어갔고,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었고, 시민들은 국회 앞으로 모였다. 계엄은 여섯 시간 만에 해제됐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그 밤은 뉴스가 아니라 날짜다. 2025년에 한번 이미 돌아왔고, 앞으로도 매년 다시 돌아올 날짜다.

그날 이후 탄핵과 파면이 이어졌고, 2026년 2월 19일 서울중앙지법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날 이래 내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게 하나 있다. 그날 계엄을 일으키게된 공기중에 떠다니는 분노까지는 알겠는데, 그 분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

왜 그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지했는가.

그 사람들이 악당이었기 때문이라고 퉁치고 끝났더라면 좋았겠지만, 어디 사람 일이란게 그렇게 쉬운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 끈질기고 어려운 그런 것들이 있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분열은 오랫동안 보수와 진보, 세대 갈등, 지역 구도라는 틀로 설명되어 왔다. 물론 모두 맞는 설명이다. 선거제도와 미디어 구조, 경제적 이해관계도 갈등을 만든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왜 분열이 반복되고 좀처럼 소진되지 않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선거가 끝나도, 정권이 바뀌어도, 판결이 나와도, 갈등의 정서적 강도는 거의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역사를 사실의 연표가 아니라, 그 사실을 통과한 사람들이 남긴 감정의 연표로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은 현재의 정책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과거가 각기만의 현재로 이어진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것을 집단 감정사라고 부르고 싶다. 한 사회 안에 오래 퇴적되어, 정치적 판단과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는 감정의 역사.

사건은 끝났지만 감정은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갈등을 볼 때 물어야 할 질문도 달라진다. 누가 옳았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두려워했으며, 무엇을 아직 슬퍼하지 못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갈등은 논리의 충돌이기 전에,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기억들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망국과 식민의 기억

한국 집단 감정사의 가장 깊은 단층 가운데 하나에는 조선의 멸망과 식민 경험이 있다.

한 왕조가 끝난 것만이 아니었다.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수치, 내부의 분열로 무너졌다는 자책, 외부 권력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함께 남았다.

그 경험은 이후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한쪽에는 이런 감각이 남았다.

질서를 잃으면 다시 망한다.

다른 쪽에는 반대의 감각이 남았다.

잘못된 권력과 기득권을 그대로 두면 다시 망한다.

하나는 붕괴에 대한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의에 대한 분노다.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출발점에는 같은 기억이 있다.

나라를 잃었다는 기억이다.


갈라진 생존의 기억

나라가 무너져가던 시기 사람들은 같은 질문 앞에서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동학농민운동에는 억압받던 사람들의 분노와 존엄에 대한 강렬한 요구가 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선언은 신분질서와 외세의 압력 속에서 인간의 자리를 다시 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봉기는 패배했다. 전봉준은 처형되었고 수많은 농민군이 죽었다. 나는 그 계보에서 하나의 정서가 반복되는 것을 본다.

저항했으나 패배했고, 그 패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순응하거나 협력했던 사람들의 선택은 훨씬 복잡하다. 적극적으로 권력과 이익을 좇은 사람도 있었고, 식민지 체제를 정당하다고 믿었던 사람도 있었으며, 생계를 위해 순응한 사람,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타협한 사람,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

이 차이를 하나의 말로 지워서는 안 된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이 복잡한 층위를 충분히 정리하지 못했다. 친일 청산은 미완으로 끝났고, 식민지기의 인적·제도적 연속성도 상당 부분 남았다.

그 미완은 한쪽에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분노로 남았고, 다른 한쪽에는 과거를 끝없이 파헤치면 공동체가 다시 갈라진다는 두려움으로 남았다.

1945년의 해방도 끝이 아니었다. 곧 같은 질문이 다시 왔다.

어떻게 나라를 세울 것인가.

이승만은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남한 정부를 먼저 수립하고 반공을 국가 존립의 원리로 삼는 길을 택했다.

김구는 남북협상을 시도했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분단된 상태의 독립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고 보았다.

두 사람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선택은 갈라졌다.

그래서 지금도 한쪽에서 이승만은 건국의 지도자이고, 다른 쪽에서는 분단과 권위주의의 책임자다. 한쪽에서 김구는 통일의 선각자이고, 다른 쪽에서는 국제정세를 충분히 읽지 못한 이상주의자다.

이 차이는 역사적 사실과 판단의 문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평가가 왜 지금도 이토록 뜨거운지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

이승만을 지키려는 기억 속에는 질서가 무너지면 다시 나라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가 있다. 김구를 놓지 못하는 기억 속에는 분단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실이다라는 슬픔이 있다.

역사 인물은 죽은 뒤에 집단 감정의 그릇이 된다.


결정의 고통과 결정당한 고통

해방과 전쟁을 지나 한국 사회는 다시 두 개의 거대한 기억을 축적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다.

산업화의 기억에는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경험이 있다. 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다시 만들었고, 가족을 먹여 살렸고, 다음 세대는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게 했다. 지금의 풍요만 보고서는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절박함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의 기준에서 보면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한 희생은 지나치게 컸고 권위주의적 통치는 명백한 억압을 낳았다. 그러나 당시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문제는 자유와 독재 가운데 어느 쪽을 좋아하느냐는 추상적인 선택만은 아니었다.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내 아이는 굶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뒤로 미루고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해야 했다.

민주화의 기억은 다른 자리에서 출발한다. 성장은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국가는 강해졌지만 시민을 보호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국가가 내린 결정의 비용을 아무런 결정권도 없는 사람들이 대신 치러야 했다.

광주는 그 기억의 가장 깊은 상처 가운데 하나다. 1980년 광주에서 국가폭력으로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그 진실은 오랫동안 제대로 말해질 수 없었다.

그래서 민주화의 기억에서 국가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대상일 수 없다. 국가는 질문받아야 하고 권력은 감시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두 기억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산업화 세대는 말한다.

우리가 감당했다.

민주화 세대는 말한다.

우리가 대신 감당하게 되었다.

한쪽은 결정의 고통을 더 많이 기억하고, 다른 한쪽은 결정당한 고통을 더 많이 기억한다.

공동체를 책임지는 자리에는 때때로 어느 선택을 해도 누군가는 고통받는 결정이 놓인다. 국가의 지도자든, 조직의 책임자든, 한 가족의 부모든, 책임의 자리에 선 사람은 때로 좋은 것만 골라 가질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결정이 어렵다는 사실이 그 결정으로 고통받은 사람의 고통을 지우지는 않는다. 반대로 결정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고통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 결정을 내려야 했던 자리의 고통과 책임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산업화의 기억은 결정을 내리고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의 고통을 더 잘 기억한다. 민주화의 기억은 그 결정 아래에서 희생을 요구받았던 사람들의 고통을 더 잘 기억한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모욕처럼 들린다. 산업화 세대의 자부심은 민주화 세대에게 독재의 미화처럼 들린다. 민주화 세대의 비판은 산업화 세대에게 자신들의 희생과 성취 전체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린다.

어느 한쪽의 기억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본 진실이 아직 한자리에 놓여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를 역사 밖으로 추방하는 말

한국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는 낙인이다. 대표적인 두 단어가 친일과 종북이다.

친일이라는 말에는 나라를 외부에 넘긴다는 역사적 공포가 실려 있다. 종북이라는 말에는 내부에서 나라를 무너뜨린다는 역사적 공포가 실려 있다.

둘은 역사적으로 같은 현상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동일한 개념도 아니다. 실제 친일 협력의 역사와 북한 추종의 역사는 각각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낙인으로 작동하는 순간 두 단어에는 닮은 기능이 생긴다. 상대를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이 공동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든다.

너는 틀렸다는 말보다 강하다. 너는 이 나라를 망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정책의 차이는 생존의 전쟁으로 바뀐다. 상대와 타협하는 것은 의견을 조정하는 일이 아니라 매국이나 반역과 손잡는 일이 된다.

망국과 분단과 전쟁의 기억이 아직 현재형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정치 언어다.


그 밤에 무엇이 만났는가

12·3은 이 감정의 지층들이 한 장면에 겹쳐 나타난 사건이었다.

계엄 선포문과 그 뒤 이를 정당화한 언어에는 반국가 세력, 자유 헌정질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표현이 반복됐다. 그 언어가 호소한 것은 새로운 감정이 아니었다. 내부의 적 때문에 나라가 무너질 수 있다는 냉전기의 공포가 다시 현재형으로 호출됐다.

반대편에서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에게는 전혀 다른 기억이 작동했다. 군인이 국회에 들어오는 장면은 광주와 군사독재와 국가폭력의 기억을 한꺼번에 소환했다. 또다시 군이 정치에 들어오게 둘 수 없다는 감각은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기억 위에 서 있었다.

두 기억은 그날 밤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한쪽은 계엄권을 쥐고 군을 국회로 보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막으러 갔다.

감정은 양쪽에 다 있었지만 권력은 한쪽에만 있었다.

그래서 책임도 한쪽에 있다.

공포를 이해하는 일과 그 공포가 한 일을 덮는 일은 같지 않다. 책임을 정확히 묻기 위해서라도, 그 행동이 어떤 감정적 토양에서 반복해서 가능해지는지까지 보아야 한다.

재판으로 사라지는 감정은 없다.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판결문이 나와도 한쪽은 이겼다 하고 한쪽은 정치 재판이라 할 것이다.


태극기를 든 사람들의 기억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극우라는 한 단어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만으로는 왜 노년의 사람들이 추위 속에서 태극기와 이승만·박정희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감정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국가 붕괴에 대한 공포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거나 그 기억 가까이에서 성장한 세대가 있다. 냉전기의 반공교육을 받았고 가난에서 산업화로 넘어가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처음부터 당연히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사라질 수도 있었던 나라다. 그 관점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는 단지 두 명의 정치인이 아니다. 혼란 속에서 국가를 세우고 지켜냈다는 기억과 결합된 상징이다.

그러므로 탄핵이나 대규모 촛불시위 같은 사건은 어떤 이들에게 단순한 정권 교체보다 훨씬 크게 경험된다. 자신들이 평생 지켜온 질서 자체가 부정되는 감각이다.

그 공포가 사회적으로 말해지고 인정될 다른 자리가 있었는가.

공포가 인정되지 않고 정치적 동원의 연료로만 사용될수록 그것은 더 거칠고 공격적인 언어로 나타난다.

빨갱이라는 말의 반복 뒤에는 증오뿐 아니라, 다른 언어를 얻지 못한 공포도 있다.


해직된 교사들의 기억

반대편에도 끝나지 않은 시간이 있다.

1989년 전교조 결성과 대량 해직의 경험은 그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노동분쟁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말했기 때문에 직업과 일상을 잃었다는 기억이었다.

이 경험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더 긴 기억과 결합했다. 국가권력에 맞섰던 여러 운동의 기억, 광주, 노동운동, 민주화 과정의 희생이 하나의 계보 속에서 해석되었다. 그 속에는 이런 감정이 있다.

말했기 때문에 처벌받았다.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웠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 기억은 민주화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그러나 모든 집단의 기억이 그렇듯, 상처는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순간 굳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과거에 탄압받았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의 모든 판단을 옳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옳았다는 기억이, 우리에 대한 비판은 다시 시작된 탄압이라는 방어로 바뀌는 순간 과거의 정당성이 현재의 성찰을 막을 수도 있다.

이 역시 그 기억을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충분히 인정되지 않은 상처는 계속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쉬지 못한다.


왜 이 갈등은 끝나지 않는가

한국 사회의 갈등이 오래 지속되는 이유를 정보 부족이나 설득의 실패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너무 빨리 다음 시대로 넘어왔다.

망국을 충분히 슬퍼하기 전에 식민지가 왔다. 식민의 기억을 정리하기 전에 분단이 왔다. 분단을 받아들일 겨를도 없이 전쟁이 왔다. 전쟁의 죽음을 다 묻기도 전에 산업화가 시작됐다. 산업화의 희생을 돌아볼 겨를 없이 민주화가 왔다. 민주화 이후에는 곧 세계화와 외환위기가 왔고, 다시 디지털 전환과 세대교체가 밀려왔다.

우리는 살아남느라 바빴다. 그래서 과거를 정리하기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는 사이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가 그것을 가져다 썼다.

친일, 빨갱이, 독재, 종북, 토착왜구, 좌파, 수구.

각각의 말에는 실제 역사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선거와 정치적 동원 속에서 반복될수록 그 말들은 과거를 이해하는 언어보다 상대를 현재에서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다.

정리되지 않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동원된다.

나는 우리가 하지 못한 일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애도하지 못했다.


애도란 호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애도는 잊자는 말이 아니다. 용서하자는 말도 아니고, 책임을 묻지 말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애도란 호명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일러주는 일이다.

누가 있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무엇을 했고, 누가 그 일을 당했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그 사람과 그 일과 그 사건을 이름 불러주는 일이다. 이 사람이 있었다. 이 일이 있었다. 이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보는 행위이다.

그래서 애도는 망각과 반대다. 제대로 호명하려면 정확해야 한다.

국가폭력이면 국가폭력이라고 불러야 한다. 학살이면 학살이라고 불러야 한다. 친일행위면 친일행위라고 불러야 한다. 고문이면 고문이라고 불러야 한다. 해직이면 해직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름을 흐리면 책임도 흐려진다. 그러므로 호명에는 사실과 책임이 들어 있다.

애도는 진실 규명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진실 규명 다음에 오는 것이고, 진실이 정확할수록 애도도 정확해진다.

그리고 사건의 이름만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도 불러야 한다.

누가 죽었는가. 누가 살아남았는가. 누가 결정했는가. 누가 그 결정의 대가를 치렀는가. 누가 자기 몫의 고통을 감당했고, 누가 남의 몫까지 떠안았는가.

사건만 이름 붙이고 사람을 지워버리면 역사책은 남지만 애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애도가 하는 일이 분명해진다. 애도는 슬픔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슬픔의 자리를 옮기는 일이다. 현재 한복판에서 계속 터지던 기억을 과거의 자리에 놓아주는 일이다.

그래서 애도는 감정의 기술인 동시에 시간의 기술이다.


그런데 왜 애도가 되지 않는가

호명하려면 부를 이름이 있어야 한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다쳤는지. 누가 쫓겨났는지. 누가 두려워했는지. 누가 결정했고 누가 그 결정의 대가를 치렀는지.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기록하지 않았다.

광장에 나와 태극기를 든 칠십대가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고, 무엇을 겪었고, 누구를 잃었고, 왜 그날 거기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든 깃발뿐이다.

1989년에 해직된 교사가 있다. 우리는 천오백여 명이라는 숫자는 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그날 집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이후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지, 무엇을 아직 억울해하는지는 모른다.

숫자는 남았지만 사람은 사라졌다. 진영은 남았지만 생애는 사라졌다.

그래서 애도가 어렵다. 애도는 추상을 향해 일어나지 않는다. 구체를 향해 일어난다. 이름과 얼굴과 생애가 있어야 슬퍼할 수 있다. 얼굴 없는 상대는 이해하기 어렵고, 이름 없는 고통은 애도하기 어렵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기 전에 서로를 모른다.

그래서 애도에는 기록이 필요하다.

기억은 사람 안에 있다. 사람이 죽으면 함께 사라진다. 기록은 그 기억을 밖에 놓는다. 다른 사람이 다시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한다. 한 번 있었던 사람이 두 번 지워지지 않게 한다.

기록되지 않은 고통은 애도되기 어렵다. 애도되지 않은 고통은 정치적으로 동원되기 쉽다.

이렇게 보면 기록은 단순한 보존의 일이 아니다. 공동체가 과거를 과거로 가질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경쟁하는 기억들이 함께 놓이는 자리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의 올바른 역사만을 만드는 일일까. 나는 점점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역사적 사실은 엄밀하게 밝혀야 한다. 국가폭력은 국가폭력이라고 불러야 하고, 친일행위는 구체적인 증거에 따라 규명해야 하며, 잘못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사실을 확정하는 일과, 사람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했는지를 기록하는 일은 다르다.

한 노인은 박정희 시대를 떠올리며 말할 수 있다.

그때 처음 배불리 먹었다.

다른 사람은 같은 시대를 떠올리며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끌려갔다.

두 기억을 평균내면 둘 다 사라진다. 하나를 정답으로 택하면 다른 하나는 말할 자리를 잃는다.

필요한 것은 두 기억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채 같은 역사 안에 놓일 수 있는 자리다.

태극기를 들었던 노인의 목소리도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 해직됐던 교사의 목소리도 들어와야 한다. 산업화를 일군 사람의 자부심도 들어와야 하고,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의 원망도 들어와야 한다.

그들의 말을 섞어 하나의 정답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먼저 그대로 놓아두면 된다.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언제 말했는지. 무엇을 직접 겪었고 무엇을 전해 들었는지. 어디까지가 기억이고 어디부터가 해석인지. 무엇을 아직 말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것을 지우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으로 우리는 추상적인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그 기억을 갖게 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애도가 시작된다.


끝나지 않은 역사를 끝내는 법

우리는 너무 많은 역사를 너무 짧은 시간에 통과했다. 망국, 식민, 해방, 분단, 전쟁, 산업화, 독재, 민주화.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날 일이 몇 세대 안에 겹쳐 일어났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을 통과한 사람들이 아직 같은 사회에 함께 살고 있다.

그러니 서로 다른 기억이 존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기억들이 만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억을 너무 자주 무기로 사용했다. 상대의 기억을 지우거나, 자신의 기억으로 상대의 존재를 심판했다.

그러나 화해는 하나의 기억이 승리하는 상태가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기억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화해가 아니다. 서로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채 한 역사 안에 함께 놓일 수 있게 하는 것이 화해다.

태극기를 든 노인의 공포를 이해한다고 그의 주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해직교사의 억울함을 인정한다고 그 조직의 모든 선택을 정당화할 필요도 없다. 이승만의 선택에 있었던 두려움을 본다고 그의 과오가 사라지지 않는다. 김구의 좌절에 담긴 슬픔을 인정한다고 그의 모든 판단이 옳았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와 동의는 다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이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상대의 상처를 인정하면 내가 진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공포를 이해하면 그의 정치까지 승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더 큰 목소리로 돌아온다.

나는 그래서 정치적 통합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설득하기 전에 서로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남기는 일. 평가하기 전에 말하게 하는 일. 하나의 결론으로 합치기 전에 서로 다른 원본을 보존하는 일.

누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두려워했고, 무엇을 자랑스러워했고, 무엇을 아직 슬퍼하고 있는지를 남기는 일.

그것이 충분히 쌓이면 우리는 처음으로 한국 사회의 집단 감정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옳았는지만 기록한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는 역사. 그 사람이 무엇을 겪었는지가 남아 있는 역사.

그때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애도는 거기서 시작한다.

애도는 상대의 역사를 지워주는 일이 아니다. 있었던 것을 있었다고 일러주는 일이다. 그 사람을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불린 기억에게 돌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과거가 제자리로 돌아가야 현재의 사람이 현재에서 만날 수 있다.

끝나지 않은 역사를 끝낸다는 것은 역사를 잊는다는 뜻이 아니다. 비로소 그것을 과거로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2025년 12월 17일 초고. 2026년 9월 7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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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글에서 쓰는 집단 감정사는 하나의 작업 개념이다. 학계의 정식 용어는 아니지만 집단기억, 역사적 트라우마, 감정정치, 정서적 양극화 연구와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