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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을 팔지 않는 경제

기억은 팔리지 않는다. 팔 수 있는 것은 기록을 만드는 일, 지키고 증명하는 일, 원본에서 자라 나오는 것뿐이다. 그 사람이 여기까지는 써도 된다고, 이 대목은 아직 두자고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오래 유지하는 일. 그 일에 값을 치르는 경제가 만들어져야한다.
원본을 팔지 않는 경제
르네 마그리트의 〈Not to Be Reproduced, 1937〉

기억이 자기 주인을 잃지 않도록


얼마 전 <미운 정과 자기 몫의 고통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다.

47년 동안 서로를 견디며 살아온 두 분에 관한 글이었다. 쓰다 보니 차마 옮길 수 없는 대목들을 '(삐-)'라고 묵음처리 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버지는 또 어떻게 했는지.

그 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밝히지 않아도 두 사람이 함께 살아온 시간에 관해 쓸 수는 있었다.

글을 읽은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오래 두면 다 맛있어지는 거라고. 그게 미운 정이라고.

같은 세월을 두고도 나는 설명할 말을 찾았고, 어머니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쓰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쓰고 보니 그 글의 '(삐~)'처리가 꽤 유용한 장치였다. 쓰지 않은 게 있었기에 쓸 수 있게 된 게 있었달까. 부모님의 삶이 내 삶의 일부라고 해서,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 판단만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을 생각할수록 이 문제가 자꾸 돌아온다.

앞선 글 <미래는 과거의 해석이다>에서 나는 시민의 기억을 남겨야 한다고 썼다. 전쟁과 산업화와 민주화를 몸으로 지나온 사람들이 아직 우리 곁에 있고, 그 목소리를 받아 적고 정리할 기술도 생겼다고. 지금 남기지 않으면 다시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그 생각은 여전하다. 그런데 남길 수 있다는 것과 맡겨도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하자. 그 안에는 자식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 있고, 이제는 세상을 떠난 사람에 관한 말이 있고, 말하면서도 공개해도 될지 자신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누가 볼 수 있어야 할까.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정리하고, 오래 지키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기억을 남기자는 마음은 여기까지 와야 비로소 하나의 일이 된다.


공짜로 남지 않는다

사람의 이야기는 공짜로 남지 않는다.

누군가 찾아가야 한다. 처음에는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 동네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씩 그 사람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루에 다 듣지 못할 수도 있다. 전에 한 말과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다. 녹음기를 끈 뒤에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돌아와서는 다시 들어야 한다. 잘못 알아들은 이름을 확인하고, 말이 끊긴 자리를 살피고, 어디까지 남겨도 되는지 물어야 한다. 기록을 마친 뒤에도 보관하고, 옮기고, 고장 난 것을 고치고, 십 년 뒤에도 열어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이 일의 수고를 많이 덜어줄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맡았다는 책임까지 대신 가져가지는 않는다.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다음 사람의 이야기도 들으려면 이 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가.

쉬운 답 하나가 떠오른다. 모인 데이터를 팔면 되지 않을까. 인공지능 회사들은 자료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의 경험이 있으니까. 그 돈으로 기록하는 사람의 품삯을 주고, 이야기한 사람에게도 얼마씩 돌려주면 되지 않을까.

그럴듯하다. 실제로 그렇게 하려던 회사들이 있었다. Datacoup은 2012년에 시작해 2019년에 멈췄다. Wibson은 블록체인 위에서 개인이 자기 데이터를 직접 팔게 하겠다고 했는데, 지금 그 회사의 링크는 데이터를 지워주는 서비스로 이어진다. 데이터를 팔게 해주던 회사가 데이터를 지워주는 회사가 되었다.

단가가 낮은 데는 산수의 이유가 있다.

큰 언어 모델 하나를 처음부터 학습시키려면 수천억 단위의 토큰이 필요하다. 토큰이라는 말이 낯설다면 낱말 조각쯤으로 생각해도 좋다. 어떤 공동체가 사람들의 목소리를 열심히 모아 사천 시간을 쌓았다고 하자. 한 사람이 하루 여덟 시간씩 일 년을 넘게 녹음해야 나오는 양이다. 글자로 옮기면 대략 일억 토큰 안팎이 된다.

수천억 대 일억.

여기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쉽다. 작으니까 값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건 틀렸다. 작은 자료도 특정 분야의 평가나 미세 조정에는 비싸게 팔린다. 그런 쓰임에서는 크기보다 정확도와 희소성이 값을 정한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 자료를 범용 학습 원료처럼 팔아서 수만 명에게 나눠 주려 할 때 셈이 맞지 않는다. 원료로서의 단가는 낮은데,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고 동의를 받고 정산해서 나누는 비용은 그것과 무관하게 높다. 배당을 약속했던 회사들이 멈춘 데가 여기였다.

계좌를 확인하고 세금을 처리하고 문의에 답하는 비용이, 나눠 줄 돈보다 컸다.

그리고 그 구매자가 매년 나타날지도 알 수 없다. 자료를 모으는 비용과 동의를 확인하는 비용은 거래가 되든 안 되든 든다.

무엇보다 한 번 넘긴 기록이 그 뒤로 어디에 쓰이는지가 남는다. 돈을 받은 순간 일이 끝나는 거래가 있다. 사람의 이야기를 맡는 일은 오히려 그때부터 어려워질 수 있다.


값이 붙기 시작한 것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에 인공지능 회사들이 자료를 구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팔리는 것이 자료 자체에서 자료의 내력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계기가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소송
    2025년 6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법의 윌리엄 알섭(William Alsup) 판사는 작가 세 명이 인공지능 회사 앤트로픽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합법적으로 산 책으로 학습시킨 것은 공정이용이지만, 해적 사이트에서 내려받아 중앙 서고에 쌓아둔 700만 권은 아니라고 갈랐다.

    "해적판을 중앙 서고에 둘 자격은 없었다."

    같은 학습인데 자료를 어떻게 얻었느냐가 결과를 갈랐다.

    석 달 뒤 회사는 15억 달러에 합의했다. 48만 2천여 권, 권당 약 3천 달러. 미국 저작권 역사상 가장 큰 합의다.

  2. 규제
    유럽연합 인공지능법은 범용 인공지능 모델 제공자에게 학습에 쓴 데이터의 요약을 공개하게 한다. 유럽집행위원회는 2025년 7월 24일 그 요약의 의무 양식을 냈고, 8월 2일부터 새 모델에 적용된다. 기존 모델은 2027년 8월 2일까지. 헨나 비르쿠넨 부집행위원장은 이걸 "신뢰할 수 있고 투명한 인공지능으로 가는 또 하나의 걸음"이라 불렀다.

    한국의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은 2024년 12월 국회를 통과해 2026년 1월 22일 시행됐다. 제31조가 생성형 인공지능 결과물에 표시를 붙이게 한다.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시이거나 워터마크·메타데이터 같은 기계 판독 방식이고, 딥페이크는 눈에 보이는 표시만 허용된다. 1년 계도기간 뒤 과태료는 최대 3천만 원.

  3. 오염
    2024년 7월 24일 네이처에 실린 옥스퍼드·케임브리지 연구진의 논문은, 기계가 만든 글로 다시 기계를 학습시키는 일을 몇 세대 반복하면 모델이 무너진다는 것을 보였다.

    드문 것부터 사라지고 결국 평균만 남는다. 제목이 그대로 결론이다. "AI models collapse when trained on recursively generated data." 논문은 한 줄을 덧붙였다. 진짜 사람이 낸 자료의 값은 기계 생성물이 인터넷에 늘어날수록 올라갈 것이라고.

    반론도 곧 나왔다. 사람의 자료를 버리지 않고 쌓아두면서 기계 생성물을 더하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질문이 바뀐다. 기계 생성물을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사람이 낸 자료가 무엇인지 골라낼 수 있느냐다.

    그리고 그 사이 인터넷은 실제로 채워졌다. 검색 최적화 회사 Graphite가 2025년 10월에 낸 조사에서, 영어 웹 문서 6만 5천 건 가운데 기계가 쓴 글이 2024년 11월에 사람이 쓴 글을 처음 넘어섰고, 2025년 5월에는 절반을 조금 웃돌았다.

    새로 만들어지는 웹페이지의 넷 중 셋에 기계가 쓴 문장이 섞여 있다는 다른 조사도 있다. 그래서 산업의 질문 하나가 남았다. 사람이 낸 것이 확실한 자료가 어디 있느냐.

세 변화가 가리키는 곳은 하나다. 바로 유래와 내력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음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내력을 확인해 주고 조건을 걸어 문을 여닫는 권한은 누가 쥐어야 하는가?


약속은 사정이 바뀌면 깨진다

2025년, 유전자 검사 회사 23andMe의 파산 절차에서 이용자들의 유전정보가 매각되거나 다른 주체로 넘어갈 가능성이 문제가 되었다. 천오백만 명 넘는 사람의 자료였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 위원장이 이용자에게 했던 개인정보 보호 약속을 인수자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서한을 법원에 보냈다.

소식이 퍼지자 자기 자료를 지우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로그인 창이 열리지 않았다.

가족의 내력을 알고 싶어 검사를 맡긴 사람은, 자기 정보가 회사의 파산 절차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전정보와 구술 기록은 같은 자료가 아니다. 그래도 이 사건이 남긴 질문은 낯설지 않다. 내가 믿고 맡긴 곳의 사정이 바뀌면, 내가 맡긴 것도 그 사정을 따라가야 하는가.

회사는 어려워질 수 있다. 주인이 바뀔 수도 있고, 처음에는 없던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때마다 사람의 기억이 운영자의 판단에 따라 새로운 용도를 얻는다면, 처음의 동의는 어디까지 유효한 것일까.

그래서 기억을 맡기는 일에는 좋은 의도보다 오래가는 장치가 필요하다. 평소에 누가 볼 수 있는지뿐 아니라, 운영하는 곳이 문을 닫으면 어디로 옮길지,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면 누가 어떤 조건으로 이어받을지까지 정해져 있어야 한다. 운영하는 쪽이 혼자서는 열 수 없어야 한다.

권리는 계약서에만 있으면 부족하다.
데이터가 관리되고 취급되는 기술과 구조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살아남은 곳

스위스의 데이터 협동조합 MIDATA는 2015년에 세워져 십 년째 돌고 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정확히 반대였다.

정관에 이렇게 적혀 있다:

  • 개인의 자료를 이용하려면 명시적인 동의가 필요하다(제5조 1항).
  • 개인이 자기 데이터의 접근권을 팔아 돈을 받도록 하는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다(제5조 3항).
  • 조합원에게 배당하지 않고, 생긴 수익은 서비스의 지속성과 공익적 목적에 쓴다(제6조).
  • 플랫폼과 관련 서비스에는 이용료를 받을 수 있다(제3조 2항).

그리고 두 가지가 더 있다.

  • 서비스와 연구 과제를 심사하는 데이터 윤리 위원회를 총회가 따로 뽑고, 이사회와 겸임할 수 없게 했다(제29~33조).
  • 조합이 해산하면 계정 소유자의 자료를 모두 지우되, 지우기 전에 내보내기 기한을 준다(제35조).

이상은 2019년 6월 총회에서 채택된 정관이고, 의장은 취리히 연방공대의 에른스트 하펜(Ernst Hafen)이다.

이 정관만으로 그곳의 살림이 얼마나 넉넉한지는 알 수 없다. 원칙을 세웠다고 운영 문제가 다 풀리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구분 하나가 분명하다. 자료를 내놓은 사람에게 판매 대금을 나누는 일과, 사람들이 자기 자료의 쓰임을 결정하도록 서비스를 운영하는 일을 구별했다는 점이다.

팔 물건을 모은 게 아니라, 지킬 것을 모았던 셈이다.


원본.


나는 여기서 '원본'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디지털 파일은 얼마든지 복사할 수 있으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파일이라는 뜻으로는 쓸 수 없다.

여기서 원본은

누가 언제 어떤 과정에서 한 말인지,
어느 대목을 어떻게 고쳤는지,
어디까지 쓰도록 허락했는지가 함께 남아 있는 기준 기록
을 뜻한다.

파일은 열 개가 있어도 기준 기록은 하나다.

그러므로 원본을 판다는 것은 파일 하나를 건네는 일이 아니다. 통제권을 넘기거나, 영구적이고 무제한적인 사용 권한을 넘기는 것이다. 파일을 복사해 주는 것과 통제권을 넘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구에게 어떤 자리에서 했는지가 중요하다.
가족에게 남기려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할 증언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연구에 쓰라고 허락한 것을 광고에 써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원본을 지킨다는 것은 그 차이를 계속 기억하는 일이다.


팔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이다


원본은 팔 물건이 아니라, 팔리는 모든 것이 자라 나오는 원천이자 근원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고 잘 지켜주면, 이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경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가 가능하다.

첫째, 기록을 만드는 일.

찾아가 듣고, 다시 듣고, 정리하는 일이다. 한 사람의 삶을 제대로 담으려면 스무 시간 안팎이 필요하고, 그 스무 시간을 위해 찾아가고 준비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그 몇 배로 든다. 이 비용은 공공이 댈 수 있다. 나라마다 말뭉치 사업이 있고 데이터 구축 사업이 있다. 다만 사업은 한 번이다. 기록을 만드는 돈은 사업이 끝나면 끊긴다.

그리고 여기서 오가는 돈은 자료의 판매 대금이 아니다. 도로를 놓는 데 예산을 쓴다고 해서 도로를 팔았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조성비를 받은 기록은 그 돈을 댄 쪽의 소유가 아니다.

둘째, 지키고 증명하는 일.

만들어진 기록을 십 년 뒤에도 열리게 하는 일, 그리고 이 목소리가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그날 그 자리에서 나온 것인지, 그 뒤로 손대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주는 일이다. 보관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이고, 그 비용을 대는 것이 이 갈래다. 출처를 확인하고 동의를 관리하고 접근을 열고 닫는 일에 수수료를 받고, 그 수수료가 보관을 산다.

십 년 전이라면 녹음 파일이 있으면 그게 증거였다. 지금은 몇 초의 목소리만 있으면 누구든 그 사람이 하지 않은 말을 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이제 거꾸로다. 내력이 확인되지 않으면 그 기록은 쓸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증명에는 특이한 성질이 있다. 자료를 넘기지 않고도 팔 수 있다. 내용은 잠긴 채로 두고, 언제 누구에게서 어떻게 나왔는지만 확인해 주면 되기 때문이다. 봉인된 상자의 봉인이 뜯기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과 비슷하다.

다만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둬야 한다. 증명하는 것은 그 말의 내용이 참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그 말을 했고 기록이 그 뒤로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억은 틀릴 수 있다. 오래된 녹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고 해서 그 안의 기억까지 검증된 것은 아니다. 기록을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일에는 이 한계를 정확히 말하는 것도 들어간다.

셋째, 원본에서 자라 나오는 것.

자녀에게 남길 작은 책이 나올 수 있다. 당사자가 허락한 기억을 찾아주는 도구가 나올 수 있다. 한 지역의 변화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시가 되고, 연구가 되고, 정책을 검토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당사자의 생산성을 높여줄 수 있는 개인 AI 비서를 만들어 줄 수 있다. 개인의 기억과 관계에 기반한 AI 보조 민주주의 공론장을 조성할 수 있다. 그때마다 쓰임을 정하고, 필요한 만큼 이용하고, 그 일을 한 사람들에게 대가를 지급할 수 있다. 수익이 생긴다면 발화자와 공동체에 무엇을 어떻게 돌려줄지도 함께 정할 수 있다.

우리가 팔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구체적이다. 한 사람의 팔십 년이 얼마인지를 정할 필요는 없다. 그 삶을 열 번 찾아가 듣는 데 얼마가 드는지, 책 한 권으로 정리하는 데 얼마가 드는지, 허락된 연구를 지원하는 데 얼마가 드는지를 정하면 된다.

그리고 이 셋은 돈을 내는 쪽이 다르다.

기록을 만드는 돈은 공공에서 나온다. 국학진흥원의 자료 구축 사업, 문체부의 문화기술 연구개발, 지자체의 구술사 사업 같은 것이다.

지키고 증명하는 돈은 그 기록을 쓰려는 기관과 산업에서 나온다. 박물관이 도슨트에 근거 링크를 붙이려고 내는 검증료, 연구자가 열람 조건을 걸고 내는 이용료, 인공지능 회사가 학습 자료의 출처를 증명받으려고 내는 수수료 같은 것이다.

원본에서 자라 나오는 것의 돈은 개인과 기관에서 나온다. 자녀에게 줄 책 한 권, 자기 기억으로 만든 개인 AI, 지역 전시와 정책 보고서 같은 것이다.

돈줄이 셋이고 서로 다르니, 하나가 끊어져도 두 가지는 남는다. 이론적으로는 공공 예산이 끝난 뒤에도 검증료와 파생물이라는 다른 수입원이 남는다. 어느 한 정부의 예산에 목숨이 걸리지 않고, 어느 한 회사의 계약에 매이지 않는다.

이 셋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원본의 통제권을 넘기는 순간 세 갈래가 동시에 낮아진다.

특정 기업이 기록을 독점하면 공공이 조성비를 댈 명분이 약해지고, 누가 어떻게 썼는지를 따라가 철회하고 감사할 힘이 사라지고, 발화자와 공동체가 파생물에 대해 협상할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니 원본을 팔지 않는 것은 착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이 일의 협상력을 지키는 방식이다.

원본을 팔지 않는 것은 착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이 일의 협상력을 지키는 방식이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곳

뉴질랜드의 Te Hiku Media가 만든 마오리어 전사 서비스 Kaituhi에는 '카이티아키탕아'라는 원칙이 있다. 보호하고 돌보며 맡아 지킨다는 뜻에 가까운 말이다.

이 서비스는 자료를 올리거나 처리한 뒤에도 그 자료를 맡아 지키는 권한이 원래의 관리 주체에게 남는다고 명시한다. 서비스를 이용해 마오리어 자료를 채굴하거나 말뭉치를 구축하는 용도도 제한한다.

도구는 쓰이되, 그 도구를 통해 들어온 언어와 지식이 아무 조건 없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되지는 않도록 한 것이다.

이 사례를 보며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기억으로 기술을 만든다면, 그 기술을 쓰는 조건에도 우리의 판단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라는 말도 조심스럽다. 공동체라는 이름이 개인의 거절을 덮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는 다른 사람의 삶도 들어 있다. 내가 겪은 일이라고 해서 그 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을 마음대로 공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원본을 지키는 일은 열쇠 하나를 쥐여주고 끝낼 수 없다. 서로의 권한이 겹치는 자리를 살피고, 곤란한 대목을 가리고, 필요하면 다시 묻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기술은 그 일을 도울 수 있다. 운영자가 혼자서 기록을 열거나 이용 조건을 바꾸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공개된 내용을 모두 거두어들이거나, 이미 나온 책과 연구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약속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 되돌릴 수 있는지 미리 설명하는 것도 기록을 맡는 사람의 일이다.


이 경제가 성립할 수 있기까지

처음 기록을 만드는 비용은 공공이 함께 부담할 이유가 있다. 지금 사라지는 기억은 나중에 예산이 생겨도 다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역사와 시민의 경험을 남기는 일이 공동체 전체에 도움이 된다면, 도서관과 기록관을 유지하듯 그 비용을 나눌 수 있다.

물론 공공의 돈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내용을 공개해서는 곤란하다.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누구에게 어떤 권한이 남는지 정해야 한다.

기록이 만들어진 뒤에는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 남는다. 출처를 확인하고, 동의를 관리하고, 이용 요청을 검토하고, 누가 무엇을 보았는지 남기는 일이다. 연구자나 기관이 이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면 그 비용을 낼 수 있다.

그 위에서 책과 전시와 연구 같은 새로운 쓰임이 자란다. 각각을 원하는 사람과 기관이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 조성하는 비용, 오래 관리하는 비용, 새롭게 활용하는 비용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나누어 감당하는 것이다.

가능한 구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 가지 수입원을 적어놓았다고 살림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누가 무엇을 위해 반복해서 돈을 낼지 확인해야 한다. 처음 기록할 때 받은 예산이 끝난 뒤에도 보관할 수 있어야 한다. 인기 있는 이야기에서 생긴 수익으로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기록도 지킬 수 있을지 계산해야 한다.

스위스의 그 협동조합은 정관 마지막에 이것까지 적어두었다. 돈이 끊겨 문을 닫게 되면 맡은 자료를 모두 지우되, 지우기 전에 주인에게 돌려줄 기한을 둔다는 것. 잘될 때의 약속만이 아니라 안 될 때 남의 기억을 어떻게 돌려줄지를 처음부터 정해둔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기록을 지켜야 할 이유는 시장이 값을 치러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동체가 대야 한다.

이것은 사업의 가능성이면서 동시에 공동체가 어떤 비용을 함께 질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말하지 않을 권리

무엇보다 이 일을 하면서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기록하는 사람은 좋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진다. 연구자는 빠진 부분을 채우고 싶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찾을 만한 자료를 모으고 싶어진다. 그 마음들이 겹치면 어느 순간 더 많이 말하게 하는 것이 성과가 된다.

그때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다는 말도 기록의 일부다. 이 대목은 가족에게만 남기겠다는 뜻도 존중해야 한다. 끝내 아무에게도 열지 않기로 한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자리가 있어야 사람은 나머지를 다 말한다.

그 결정 때문에 만들 수 없는 책이 생기고, 받지 못하는 계약이 생길 수 있다.

지키는 일과 돈을 버는 일이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잘 지키기 때문에 신뢰를 얻고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경우가 많겠지만, 당장의 수익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때 지킬 선이 있어야 한다.

수익이 날 때만 존중되는 권한으로는 사람에게 삶을 맡겨달라고 할 수 없다.


남지 않은 기억의 자리

지난 글에서는 사람들의 기억이 모이면 우리가 살아온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썼다.

그 생각에 이제 조건을 붙이고 싶다.

많이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기록이 사회 전체의 목소리가 되지는 않는다. 말할 여유가 없었던 사람, 기록자를 믿지 못했던 사람, 말하는 것이 위험했던 사람은 빠져 있을 수 있다.

남아 있는 기억을 읽을 때에는 남지 않은 기억의 자리도 헤아려야 한다.

같은 일을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차이를 지워서는 안 된다. 기록에 근거해 보고서를 만들었다면, 당사자가 그 해석을 읽고 자기 뜻과 다르다고 말할 자리도 필요하다.

기억이 공동체의 판단에 쓰이려면, 기억을 모으는 절차만큼 해석을 다시 묻는 절차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기록이 쌓일수록 운영자의 힘만 커지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더 많은 말을 가진 곳이 더 많은 것을 결정하게 되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은 아니니까.


다시 내 부모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어머니가 읽으신 글에는 '삐~'가 남아 있었다. 굳이 그 부분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여지는 전달되었다. 그 삐처리된 구체적 장면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의 자리를 남겨두었는지 말할 수 있었고, 어머니는 그 글에 당신의 해석을 보태셨다.

그 정도면 충분했던 것이다.

시민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남기는 사람이 어디까지 남길지 정하고, 듣는 사람은 그 뜻을 기억하고, 훗날 그 기록을 읽는 사람도 자신에게 허락된 자리를 아는 것.

그 일을 오래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찾아가 듣는 사람에게 품삯을 주어야 하고, 기록을 보관할 곳이 있어야 하고, 십 년 뒤 누군가 문을 두드렸을 때 응답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함께 마련해야 할 것은 그 비용이다.

나는 기억을 남긴 사람이 자기 기록을 다시 펼쳐보는 순간을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써도 된다고, 이 대목은 아직 두자고, 저 이름은 잘못 적혔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오래 유지하는 일.

그 일에 값을 치르는 경제를 만들고 싶다.


미래는 과거의 해석이다」에 이어.

사례와 숫자의 출처

  • Datacoup, 2012~2019. 2019년 11월 서비스 중단. 정리
  • Wibson, 2018 출시. 현재 링크드인이 데이터 삭제 서비스 illow로 연결. 관찰
  • Bartz v. Anthropic, N.D. Cal. 3:24-cv-05417. 2025-06-23 약식판결, 2025-09-05 15억 달러 합의, 2026-07-20 최종 승인. 공정이용 판단은 원고 3인의 책에 한정, 집단소송 인증은 해적판 부분. 작가조합 설명 · 최종 승인 보도
  • EU AI Act(규정 2024/1689) 제53조 1항 d호. 집행위 학습 콘텐츠 공개 요약 양식, 2025-07-24. 보도자료
  •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제31조. 2026-01-22 시행. 정리
  • Shumailov 외, "AI models collapse when trained on recursively generated data", Nature 631, 755~759, 2024-07-24. 논문. 원문 마지막 문장: "the value of data collected about genuine human interactions with systems will be increasingly valuable in the presence of LLM-generated content in data crawled from the Internet."
  • 반론: Gerstgrasser 외, 2024, arXiv 2404.01413. 사람 자료를 쌓아두면 무너지지 않는다.
  • Graphite 조사, 2025-10. 영어 문서 6만 5천 건. AI 탐지기로 판정한 것이라 정확도 논란이 있고, 유료 사이트가 Common Crawl 수집을 막아 사람이 쓴 글이 표본에서 빠졌을 수 있다. 정리
  • Ahrefs 조사, 2025-04. 새 페이지의 74.2%에 기계 문장 포함, 순수 기계 생성 2.5%. 정리
  • 23andMe 파산, FTC 위원장 서한 2025-03-31. FTC
  • MIDATA 정관, 2019-06-26 총회 채택. 정관
  • Te Hiku Media, Kaituhi 카이티아키탕아 원칙. 원칙